2006/12/20 15:53
(몇달 전 사과나무에 실린 인터뷰. 인터뷰어 임지희)

김규항은 어린이 잡지 <고래가그랬어>의 발행인이다. 그는 또한 발표하는 글마다 이슈가 되는 칼럼니스트이다. 간결하면서도 뜻한 바를 명쾌하게 표현해 내는 그의 문장은 잡지 글쓰기의 ‘전형’으로 평가되곤 한다. 그는 탁월한 인터뷰어로 소문나 있는데 그의 인터뷰기사를 자주 볼 수는 없다. 그는 직업적으로, 정기적으로 인터뷰하지 않기 때문에 꼭, 널리 알려야 할 ‘위대한 정신’이 아니라면 굳이 누구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를 잘 아는 한 후배는 그에게 ‘B급 좌파’라는 닉네임을 만들어주었다. 자신도 그 호칭이 싫지 않은 눈치다. 좌파로서 그는 광야의 세례 요한처럼 담대해서 주류사회의 심기를 여간 불편하게 하는 게 아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종류다. 악역을 맡은 이에 대한 무한한 지지와 존경, 그 반대편에 있는 숙명적 안티다. 두 종류의 시선은 같은 질량으로 양립하지 않는다. 당연히 후자 쪽이 압도적이다. 그건 그가 던지는 메시지에 전혀 은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글이 어떤 사람에겐 감당할 수 없는 치부를 드러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아직 노선을 정하지 못한 비판적 지지자들이 있다. 그들은 너무 유약해서 그가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경기를 하며 이탈한다. 하지만 그가 목소리라도 높여보는 건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려는 나름의 자구책일 뿐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그’야말로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그는 조선일보, 독도, 비정규직 노동자, 인권 문제 등에 관해 끊임없이 논쟁거리를 제공하며 시대와 반목했다. 그것은 그가 차린 출판사 이름 ‘야간비행’처럼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외로웠다. 그는 좌파로서의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 만큼 치열한 자의식의 사람이다. 그의 노력은 소모적이지만은 않았다. 치명적으로 균형감각을 상실해가던 우리사회가 단 0.1㎜라도 왼쪽으로 이동했다면 그의 이름도 함께 기억되리라.

지난해 그는 느닷없이(자신에겐 전혀 느닷없던 일이 아니었지만) 모 처에서 예수를 강의한다고 했다. 나는 교회 밖에서 예수를 뭐라 말하는지 궁금해 하던 터라 수강신청을 했다. 강의 제목은 <나의 예수전>. 다행히 그는 영성을 인정하는 좌파였다. 좌파 지식인이 말하는 예수는 내게 익숙하던 예수와 ‘거의’ 같으면서 ‘많이’ 달랐다. 같은 건 예수 그 자체였고, 다른 건 예수의 가르침을 생활에 적용하는 크리스천들의 태도였다.

예수는 나에게 있어 복을 부어주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 나의 왕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예수를 믿는다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충분한 돈을 벌게 해달라고 주야로 기도할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과 친구가 되고, 그 친구가 어려움을 해결하도록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김규항’이라는, 비교적 투명한 거울을 통해 보니‘구제를 빙자해 물질에 대한 욕망을 정당화하는’나 자신이 비쳤다. 그건 전혀 틀린 방법은 아니지만 누가 보아도 자기기만에 가까운 것이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내 ‘즐겨찾기’에 등재된 그의 블로그 하루 방문자수가 5천 명을 넘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한 내 관심이 보다 객관적이고 공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의외로, 조건 없이 그러마고 회신이 왔다. 인터뷰는 서교동에 있는 <고래가그랬어> 사무실에서 세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먼저, <고래가그랬어>가 낯선 분들도 있을 테니 <고래>가 어떤 잡지인지 소개해 주세요. 우리 경쟁지가 아니니까 PR할 기회를 충분히 드리겠어요.

현실 사회주의가 옳다, 좋다는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는 그 출발부터 사적 소유나 이기심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문제가 좀 있어요.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는 사회라 어떻게 보면 가장 자연스럽지만 그 자체로 선한 체제는 아니에요. 욕망에 맡겨진 사회니까. 자본주의를 인정하더라도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되기 위해선 거기엔 견제가 필요한데 그 견제를 가능하게 한 큰 힘이 현실사회주의였어요. 냉전시대에는 두 세력이 대립하면서 서로 자기 체제가 훨씬 우월하다는 걸 보여줘야 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가 사회복지를 도입하기도 했죠. 사실 사회복지는 자본주의 개념이 아니거든요. 자본주의 개념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면 다 잘 살게 된다는 논리잖아요. 그건 사실 거짓말이죠. 오히려 계급간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죠. 그래서 사회주의 개념을 부분적으로 도입해서 사람이 견딜만한, 살만한 자본주의로 노력하는 게 보였는데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니까 그 거대한 견제의 힘이 없어진 거예요.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하든 그건 두 번째 문제예요. 어쨌든 그게 자본주의 사회를 좀더 건전하게 하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는 거죠. 근데 그것이 무너지면서 이제 막나가는 자본주의가 된 거죠. 그것이 소위 말하는 신자유주의예요. 우리 사회는 완전히 군사파시즘에 잡혀 있다가 절차적 민주화가 되자마자 양식 있는 자본주의 그런 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장 신자유주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요즘엔 핸드폰도 하나씩 있고 차도 다 있는데도 이상하게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고단하고 불안한 거죠. 그러다보니 겁나서 애를 못 낳는 거죠. 결국 출산율이 세계최저가 되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이런 상황이 되니까 부모들은 다급한 거예요. 자기 자식을 이런 사회에 무방비 상태로 내보냈다간 완전히 하층민으로 떨어질 것 같으니까. 결국은 선한 걱정과 사랑에서 시작됐지만 결과는 애들이 철저하게 상품으로 길러지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교육이 철학도 없어지고 가치관도 없어지고 무조건 경쟁력, 경쟁력만 강조하고. 그 전에는 사회가 군대처럼 굉장히 권위주의적이었지만 초등학생들은 느슨했어요. 친구를 경쟁자로 파악하는 애들이 없었고. 근데 지금은 극단적인 경우에는 입 떼자마자 영어를 시작해요. 아이들은 우정이 뭐고, 연대가 뭐고, 양보와 평화가 뭔지 그런 것들을 습득할 기회가 없는 거죠. 그런 걸 배우긴 해요. 논술시험에 나오니까. 그런데 몸으로 습득할 기회가 없죠. 생태 체험시키는 것도 학교 공부와 관련이 있고 다분히 목적적이죠. 근데 아이들은 자기들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어른 의사에 의해, 어른이 마련해놓은 세상에서 사는 거잖아요. 근데 우리가 고작 이 따위 세상을 마련해 놨으니까 아이들한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들 하는 경쟁이니 상품에 관한 이야기 말고, 인간에 대한, 자연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는 잡지를 만들자 그런 거죠. 아이들은 충분히 가능성도 있고.

지금 <고래>의 모습을 보면 이런 책을 부모들이 구독을 하게 할까, 좀 걱정스러운 면이 있는데요.

처음에 구상하면서도 실현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소년중앙>, <새소년> 같은, 순전히 재미와 상업성으로 만들어진 잡지도 이미 20년 전에 폐간됐잖아요. 그렇다면 아이들을 위한 종합 월간지는 장르 자체가 폐기됐다고 봐야죠.

그런데 하물며 어린이 교양지라고, 거기다 보수적인 어른들이 봤을 땐 상당히 거슬리는 내용이 들어가 있고. 그런데 어떻게 시작할 수 있었는지요?

상업적이지 않은데다가 세태의 흐름에 거스르는 지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가 거기 돈을 대겠어요. 창간하는 데만 몇 억이 들어갈 텐데. 근데 신앙적으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그런 표현을 잘 안 하는데 그 이유는 그 표현이 보편적인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런 걸 과학이나 합리로 해석하면 우연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오히려 비합리적이거든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우주의 기운이 모여서 길이 열린다, 그런 거죠. 어쨌든 그렇게 좋은 투자자를 만나 그분에게 투자를 받은 거죠. 근데 창간 직전에 그분이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고래>는 상당히 어렵게 출발했어요. 창간 준비 기간엔 비현실적일 만큼 좋았는데 창간부터는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거죠. 그분이 갑자기 돌아가셨고, 그분의 가족들은 이 책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죠. 워낙 그의 카리스마로 돌아가던 회사는 위기에 빠졌고 그러다보니 <고래> 같은 건 아무래도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돼 있죠.

그 다음부턴 어떻게 했나요?

돈 꾸러 다닌 거죠. 난 가진 게 없으니까. 하다하다 도저히 한계에 부딪쳐서 지난 1년 반 동안 운영 실무를 편집장인 후배가 맡았다가 지금은 다시 내가 해요. 우리 둘 다 개인 경제는 파탄이 났죠. 원래도 좀 파탄이었는데…. 그러다가 최근에 또 엔젤이 나타났어요. 악성 채무를 갚고 그 전에, 말이 안 되는 상황에서 아주 나쁜 상황으로 좋아졌어요. 지금도 참 힘든데 어쨌든 편집장인 후배가 1년 반 동안 자기 역량의 9할을 빚쟁이를 상대하는 데 썼으니까. 편집장이면서도 기사를 기획하는 데는 여력이 없었죠. 가슴이 아픈 건 <고래>가 창간한 지 3년이 됐는데 창간호보다 낫지 않다는 거예요. 책에 좀 더 신경을 쓰고 몰두할 수 있는 조건이 이제 마련된 거예요.

선생님 블로그에 매일 드나들면서도 <고래>가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있는지 몰랐어요. 근데 너무 의연하신 거 아니에요?

차분하게 애들하고 놀면서 문화적으로 잘 누리면서 사는 거 같으니까 그렇게 느껴졌나 보죠. 그럼 이젠 어려운 내색을 좀 해야겠네. 실제상황을 과장할 것까진 없지만 조금 느끼게는 해 줘야지. 의연하다기보다 편집장이나 나나 성격이 그래요. 보통 사람 같으면 도망갈 거예요. 만약 원래 투자했던 분이 살아있는데 이렇게 됐다면 도망갔을 거예요. 근데 이 양반이 없으니까 오히려 바로 위에서 씩 웃으면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거야. 그러니 끝까지 해봐야지. 오기도 있고. 이런 잡지도 살아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 자체가 큰 의미가 있으니까요.

더 적극적으로 블로그를 <고래> 홍보의 창구로 활용해 보시면 어때요?

내 블로그에 하루에 5천 명쯤 들어오는데 매일 새로운 사람이 오는 게 아니고 대부분이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분들이에요. 잡지의 컨셉 자체가 폭발적으로,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긴 힘든 부분이 있어요. 아마 그분들을 통해 그나마 홍보가 많이 되었을 거예요.

<고래>는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인데다 만화도 기존에 우리가 아는 예쁘거나 마냥 귀엽기만 한 캐릭터가 아니고 좀 거칠어 보여요.

전 아이들한테는 맑고 깨끗한 것만 보여줘야 한다는 말을 가장 싫어해요. 이미 애들은 잠자는 시간만 빼면 전쟁터 같이 서로 싸우는 잔인한 곳에서 살고 있어요. 그런 애들한테 맑고 깨끗한 것만 보여줘야 한다는 자체가 굉장히 기만적인 거죠. 어른들의 자기만족이에요. 이 사회의 돌아가는 근간을 아이들한테 전부 주입해야 된다는 건 아니지만 아이 수준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된다고 봐요. 이 사회가 그런 걸 너무 안 가르치니까. 요즘은 어느 부모가 “너만 잘났다고 되는 게 아니야. 니 친구들과 서로 양보하고 친구가 잘 되는 걸 기뻐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야.” 만약 이렇게 가르치면 그 앤 완전히 망하는 거죠. 어떤 부모도 아주 이악스럽게 ‘친구는 경쟁자고 꼭 이겨야 해’라고 말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애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몰아가고 있잖아요. 그림도 너무 희화적이거나 서구화된 캐릭터는 현실성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고, 잡지 내용에 맞지도 않으니까 다소 거칠더라도 지금처럼 가게 된 거예요.

지난해 선생님이 예수전 강의한다고 했을 때 무척 뜻밖이었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 말고도 많았을 거예요. 예수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 건가요.

예수에 대한 관심은 꽤 오래됐죠. 중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예수를 제대로 알기 시작한 건 대학 입학한 다음부터예요. 저한테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죠. 제 생각과 행동의 기반이 되는 정신적 사고 틀이거든요. 좌파들은 대개 맑스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제 경우는 예수였죠. 우리사회가 90년대 이후 절차적 민주화가 되고 군사파시즘이나 권위주의는 사라졌지만 극단화된 자본주의 문제가 더 심각해졌어요. 양극화가 두드러져 빈곤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 됐지요. 문제는 그런 변화에 대해 대응하는 사람들이 전망을 좀 잃었다는 거예요. 아무래도 그런 문제에 대응하는 가장 분명한 흐름이 사회주의였는데 그게 무너졌으니까. 그래서 맑스주의 계열의 사고를 가진 분들이 위기에 빠져 들었는데 저 같은 경우 출발이 달랐으니까 절망하지 않았어요. 나는 사회구조적인 것을 고치는 것과 신앙, 즉 인간의 영성 문제가 구별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예수가 거기에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전부터 갖고 있던 예수를 통한 비전을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거죠. 절망했다면 예수를 봐라, 하고. 그런데 문제는 예수가 우리나라 개신교에서는 많이 변형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안에 갇힌 예수가 아닌, 나에게 예수는 누군가 하는 문제를 한 번 점검해보자는 취지로 <나의 예수전>을 시작하게 된 거죠. 신앙은 논리나 합리가 아니지만 신앙에 이르기까지는 자기 신앙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앙 속에 정치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있다고 보는데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신앙의 한쪽인, 영적인 부분만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저도 굳이 밝히면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영적인 노력을 많이 해요. 기도 같은 것. 저는 영성을 이해하고 유지하지 못하면 예수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주장은 주류 체제는 물론 기성 교회와도 배치되기 때문에, 반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요. 너무 힘들고 외로운 길일 것 같은데….

예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그 양반은 2천 년 동안 오해를 받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상태로 교회 안에 갇혀 있는데 뭐.

선생님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정치인에 대해 비판적인데 선생님이 생각하는 좋은 정치인과 나쁜 정치인의 기준은 뭔가요.

항상 좋은 정치인이나 항상 나쁜 정치인은 존재하지 않아요. 어떤 이들에게 좋은 정치인이 어떤 사람한테는 나쁜 정치인이죠. 최근의 일을 예로 들자면, 자본의 국경이 없는 신자유주의에선 몇몇 자본가에겐 FTA가 훨씬 이익이기 때문에 그들의 뜻을 대변하는 정치인이 좋은 정치인이에요. 하지만 FTA를 해서 위기에 빠질 보통의 노동자, 농민들, 서민들에게 있어 FTA를 옹호하는 정치인은 좋은 정치인이 아닌 거죠. 국익 국익하는데 모든 국민이 누릴 수 있는 국익이란 없어요. 어떤 계급에겐 좋고 어떤 계급에겐 나쁜 거죠. 정치인들이 말하는 국익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말하는 거죠.

우리나라 국민들은 정확한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불이익이 모두 자신한테 돌아가니까 서글픈 거죠.

우리 인민들은 왜 자기 삶이 고단해지는지 알지 못한 채 고통 받고 있어요. 사람들이 진보적이라고 하는 개혁세력에 실망하면서 그들도 우리를 위한 정치인이 아니구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인들이구나 그랬을 거예요. 그러면 열린우리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민노당으로 가든지 해야 하는데 선거하면 뜬금없이 한나라당으로 가요. 생각이 뭉뚱그려지는 거죠. 우리 사회를 계급으로 나누어서 보지 못하고 뭉뚱그려서 우리나라의 이익이냐 아니냐 그렇게 보니까 그 다음부턴 남는 게 윤리밖에 없는 거예요. 나쁜 놈, 좋은 놈. 역시 정치 능력이 미숙한 탓이야, 수권경력이 있어야 돼. 그렇게 현 정권을 비판하고는 한나라당을 선택하는 거죠. 사실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이 정도 외형을 갖춘 나라에서 이 정도로 우편향인 나라는 없어요. 민주화가 되었기 때문에 좀 진보적인 정당도 활성화될 만한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해요. 일본도 우경화가 심하지만 여전히 공산당신문이 우리나라 한겨레보다 발행부수가 더 많거든요. 내 목소리가 자꾸 커지는 건, 우린 너무 심하게 좌우가 불균형 상태라서 ‘균형’을 좀 갖자는 거죠.

서른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하셨는데요. <씨네 21>에 칼럼니스트로 데뷔하기 전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영화이론서 만드는 출판사도 했었고,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퍼블리싱 디렉터로 일했고, 인쇄물에 관한 한 안 해본 게 없는 거 같아요. 퀵 서비스도 할 뻔 했는데 갔더니 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오토바이와 권리금 500만 원을 가져와야 된다고 하더라고. 나는 어려워서 갔는데 그 돈을 어디서 구해. IMF 때 얘기죠.

선생님이 잡지나 신문에 쓰는 글을 보면 너무 강경한 어조로 표현돼서 읽기도 전에 마음이 조금 불편해져요. 어떤 땐 선생님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도 멈칫해질 만큼.

그건 저한텐 무척 중요한 지적인데 지금은 블로그를 통해 내 생각을 전달한다는 데 충실하지 못해요. 힘이 좀 빠진 거 같아요. <고래> 신경쓰다보니까. 제가 제 글을 보더라도 그건 최대의 효과를 갖는 글이 아닌 게 많아요. 이미 공감을 하는 사람들도 불편해 하니까요. 앞으로는 좀 완곡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요.

선생님 글은 언제나 큰 반향을 불러오죠. 어떤 사람들한텐 욕을 많이 먹기도 하고요. 한바탕 욕을 먹고 나면 너무 끔찍해서 힘이 딱 풀릴 것 같은데.

원래 공감은 조용하고 반대는 시끄러운 법이니까. 제가 엄청나게 욕만 들은 것 같은 큰 규모의 일이 몇 번 있었지만 그렇게 낙심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조용히 지지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 때문이죠. 메일도 많이 보내고. 또 공감하는 분들은 원래 말이 없는 법이니까.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자녀교육을 모델로 삼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 같아요. 블로그를 통해 선생님이 자녀들에게 무척 자상하고, 인간미가 느껴지게 기른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저도 부족하게나마 그러려고 노력하고요. 아무래도 선생님 같은 분이 있다는 게 힘이 돼요. 선생님은 단이와 건, 두 아이에게 무엇을 가장 강조하나요?

저희 애들 둘이 먹을 거 갖고 싸워서 나한테 크게 혼난 적이 있어요. 우리 집에선 그런 거 양보 안 하고 티격태격 했다가는 가장 크게 혼나요. 서로 양보하고 연대하는 건 제가 필사적으로 가르쳐야 할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자꾸 찢어놓는 세상이라 제가 강조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저절로 그렇게 길들여질 테니까. 제가 그때 큰애한테 한 얘기가 있죠. “나는 예쁜 딸도 필요 없고 공부 잘하는 딸도, 그림 잘 그리는 딸도 필요 없다. 친구나 동생, 사람들에게 서로 양보하고 힘을 합칠 줄 모르는 사람은 내 딸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극단적으로요. “친구나 동생과 양보하고 연대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하나뿐인 내 딸이지만 안 그러면 내 딸이 아니다.” 그 말이 얼마나 강하게 들렸으면 단이가 눈물을 흘리더라구요. 그 외에 굳이 아이들한테 강조하는 게 있다면 밝고 무조건 잘 뛰어놀게 해요. 난 단이가 책 많이 보는 거 원치 않아요. 책만 읽다보면 머리만 크고 결국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아요. 다른 사람에 대해 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의감, 사랑은 책이 아니라 어릴 때 정서적인 활동을 통해서 많이 길러지거든요. 그래서 자연 속에 많이 풀어놓는 편이에요.

오전 11시에 시작된 인터뷰는 오후 2시가 조금 넘어 끝났다. 사무실을 나오는 길에, 함께 갔던 사진작가 김태연 씨는 그의 블로그 주소와 그가 쓴 책의 제목을 나에게 적어달라고 했다. 그는 단숨에 또 한 사람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것이다.

세상을 개선하는 것은, 역사책에 보기 좋게 기록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문제의 지점에서 실제로 피해를 당하고 슬픔을 겪고 억압을 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거라던 그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그는 좌파이기에,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제자이기에 자신의 세상적 성공을 위해서는 기도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그가 끝없이 자신을 광야로 내몰며 이 사회와 고단한 전쟁을 하는 동안, 그의 딸은 어느새 사춘기를 맞았다. 그와 그의 딸에 관해 생각하는 며칠 동안 나도 모르게 몇 번, 눈물이 흘렀다.
2006/12/20 15:53 2006/12/2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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