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2/05 21:48
평론가란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에 기생하는 사람’이다. 영화평론가란 대개 영화감독에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음악평론가란 작곡이나 연주자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문학평론가란 작가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출발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평론가란 대개 애초 생산을 꿈꾸었으되 재능의 부족이나 의지의 박약, 혹은 지나치게 운이 없어(본인의 주장이 그렇다는 얘기) 꿈을 접었으나, 아예 그 바닥을 떠나려니 너무나 서럽고 딱히 갈 데도 없어 ‘남의 생산에 평론이나 일삼으며 사는 사람‘이다. 평론가의 재능이란 생산과 관련한 현상들을 얼마나 그럴싸한 글(말)로 꾸며대는가에 있다. 평론가들은 평론이 생산물의 질과 가치에 대해 말한다 주장하지만, 이른바 좋은 평론이란 어디까지나 ’글로서의 그럴싸함‘을 기준으로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가장 유능한 영화평론가는 영화에 대해 가장 무딘 사람일 수 있으며 유능한 음악평론가는 음악에 가장 무딘 사람일 수 있으며 다른 생산에 기생하는 평론가 역시 그 생산물에 그렇다. 그러나 먹고사는 일과 관련한 인간의 본능이란 언제나 대단한 것이라서 한 생산의 언저리에 평론가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못 생산과 긴장을 이루는 (듯한) ‘평론계’가 구축되곤 한다.

한국의 대중문화 평론계는 평론의 그런 보편적인 생성과정에 좀더 특별한 사정이 덧붙여진다. 그것은 한국의 80년대라는 특별한 시기와 관련한 것이다. 오늘 한국의 모든 진보적 열정은 전적으로 80년대를 근거로 한다. 물론 한국에서 진보주의의 첫 번째 시기는 일제 치하와 해방 공간이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제 치하 독립운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좌익계 독립운동이 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해방 공간은 좌익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미군정청에서 서울시민들을 상대로 한 ‘어떤 세상을 바라는가’라는 설문에 사회주의를 선택한 한국인이 칠할 가량이었다. 박정희 같은 이도 사회주의자(그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군과 대치하던 일본 관동군 헌병이었고 해방공간에는 육군내 남로당 책이었으나 여순반란사건 즈음 동료들을 밀고하고 혼자 살아남는다.)였을 만치 넘쳐나던 한국의 진보적 기운은 6.25전쟁을 통해 철저히 박멸된다. 한국에서 진보주의는 80년 광주의 경험을 통해 새순이 돋고 30여년 동안 눌렸던 만큼 더 빠른 기세로 폭발한다. 세상은 개선되는 게 아니라 변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80년대 중반 즈음 한국의 인탤리들에서 대세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변혁의 열망은 90년대초 밖에서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안에서 폭력적인 파시즘이 사그라들자 순식간에 식는다. 인텔리들은 대개 역사의 종언을 되내이며 청산의 길을 간다.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며 나름의 모색을 계속하지만 그들은 이후 10여년 동안 낡고 어리석은 사람들로 경멸당한다.

한국의 대중문화평론계는 인탤리들의 그런 청산의 한 방식으로서 잉태되었다. 90년대초에 인탤리들은 자신들이 80년대에 지나치게 정치 편향적이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 반성은 더 이상 정치적 열정을 갖는 일을 모면하려는 욕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들에겐 뭔가 새롭게 집중할 것이 필요했고 그들은 대중문화를 선택했다. 그들이 지난 세월 저질적이고 퇴폐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반민중적이라 경멸하던 대중문화 말이다. 한국의 진보적 인탤리들에게 대중문화가 갑자기 가장 중요한 얘깃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탈춤이나 마당극, 혹은 소련식 집체극에 전념하던 시절 타락한 양키문화의 첨병이라 여기던 신중현을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옹립했다. 서태지가 가진 얼마간의 반항끼는 한없이 부풀려져 새로운 시대의 영웅적 저항정신으로 묘사되었다. 그런 우상들은 그들의 동세대들에게 개연성없는 청산을 재론하지 않으면서 알량한 정치의식을 모면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그들의 평론은 승승장구했다.

그들은 대중문화에 기생하기 시작했다. 청산의 한 방식은 먹고사는 일의 한 방식이 되었다. 대중문화의 생산이야 우등생 출신인 그들에게 처음부터 불가능했지만(그런 능력은 대개 선생과 부모와의 끝없는 갈등을 수반하는 한 많은 청소년기와 등가 교환된다) 그 생산을 그럴싸한 글(말)로 꾸며대는 일은 손쉬운 일이었다. 말과 글로 떠들어대는 일이야말로 그들의 이미 확보된 재주였고, 대중문화의 알맹이에 대한 일천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썩 그럴싸한 평론들을 써내곤 했던 것이다. 그들 이전에도 대중문화에 기생하는 평론가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처럼 생산물의 역사/사회적 배경을 들먹이는 수법을 사용하진 못했다. 그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 역사와 사회에 집중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평론은 대중문화에 익숙치 않으면서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인탤리들에게 강력히 어필했다. 90년대초, 한국의 대중문화평론계가 매우 빠르게 형성되었다.

10여년이 지난 오늘, 그들은 여전히 대중문화평론계의 상층부를 이룬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문화에 대해 평론가를 상회하는 정보와 식견을 가진 대중문화의 수용자들(은 오늘 청년 세대의 거의 전부다)과 묘한 긴장을 이루고 있다. 어떤 필요에 의해 뒤늦게 접한 게 아니라, 어릴 적부터 대중문화를 숨쉬듯 살아온 오늘의 수용자들에게 ‘생산에 대해 그리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럴싸한 글(말)이나 꾸며대는’ 평론가들은 골아프고 불필요한 존재들이다. 결국 평론가들이 생산물이 갖는 의미에 집중할수록, 수용자들은 더욱 생산물 자체에만 집중하게 된다. 수용자들은 평론가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중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고양이를 부탁해>에 평론가들과 매니아들의 엇갈린 반응은 그 예라 할 수 있다. 두 영화는 좋은 영화고 그런 좋은 영화들이 외면 당하는 일은 애석하지만, 그런 현상을 무작정 개탄하는 일은 상황의 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로 그런 개탄이야말로 수용자들로 하여금 그 영화들을 좀더 회피하게 하는 이유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 평론과 수용자들의 심각한 부조화는 결국 ‘평론계’를 만들어 10여년 이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대중문화평론의 첫세대가 교체되어야만 해결될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처음부터 대중문화의 생산에 기생하기엔 적절한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한국에 대중문화평론계를 구축하고 그런 일로도 먹고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는 공적을 남긴 채 사라지는 게 적절할 것이다. 새로운 세대가 대중문화 자체에 정통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이런저런 사회적 의미에는 너무 무지하지 않느냐, 진정한 대중문화를 분별할 능력이 없지 않느냐는 따위 염려는 부질없다. 의미와 분별에만 집중하는 세대가 사라지면 오늘 수용자들 안에서 의미와 분별에 대한 적절한 배분이 이루어질 것이다. 탄생은 비루했지만 평론 또한 생물이다. (GQ)
2002/02/05 21:48 2002/02/05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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