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1/05 23:02
자신의 오류를 역사의 오류로 자신의 실패를 역사의 실패로 돌리는 데 능한, 유약하고 비굴한 인탤리들은 역사적 격변 앞에서 종종 파행한다. 한국에서 80년대의 열망과 90년대의 좌절이라는 역사적 격변 역시 인탤리들의 이런저런 파행을 낳았다. 인탤리들의 그런 파행은 단지 제 삶에서 현실의 무게를 덜어보려는 얕은 수작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고유한 기술(제 생각을 글이나 말로 남다르게 표현해내는)과 결합하여 자못 그럴싸해진다. 그런 파행의 가장 멋진 예는 바로 '도사'다. 김지하에서 박노해까지, 역사적 격변 앞에서 인탤리들은 '모든 것을 깨우친 도사'가 되어 현실을 '초월'한다.

ꡒ똥을 누면서 나는 내가/아래 위로 구멍 뚫린/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아하! 내가 통이다/내가 걸어다니는 통이다ꡓ 10월 27일자 <한겨레>를 보며 나는 서글프게도 내 청년시절의 소중한 선생이던 이현주 목사가 도사의 대열에 합류했음을 알았다. 도사가 된 그는 말한다.ꡒ부시와 라덴은 같은 편이다. 그들은 싸우는 척하지만 서로를 돕고 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세력의 대표들이 바로 그들이다.ꡓ 얼핏 공평무사하기 짝이 없는 그 말은 (경솔하게도 라덴이 미국 사건의 범인이라는 미국의 주장을 전제로 하는 데다) 그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관계들을 마치 진공상태처럼 차갑게 뭉게버린다.

미국사건은 어느 호사스런 서양학자의 말처럼 '문명의 충돌'이 아니고, 부시의 말처럼 '자유에 대한 침범'은 더더욱 아니며, 단지 '오랜 일방적 가해자가 당한 뒤늦은 최초의 보복'이다. 그런 분명한 사실 앞에서, 가해자의 무소불위한 권세 덕에 단 한번도 제대로 인류 앞에 제 억울함을 알릴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한 앞에서 '폭력은 모두 나쁘다'는 지당한 말씀(폭력을 사용하는 누구도 폭력이 좋은 거라 말하진 않는다)이나 읍조리는 일은, 동네 양아치의 싸움 앞에서 '누가 먼저 때렸는가'를 따지는 파출소 순경보다 한가롭다.

그는 다시 말한다. ꡒ모세는 앙갚음을 하라고 했지만,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ꡓ우리는 기독교를 대표할 만한 이 유명한 경구가 역사 속에서 피억압자의 정당한 분노를 무마하는 데, 늘상 동원되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평화주의자였으나 뼈없이 흐물거리는 무작정한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어떤 극악한 상대도 끝내 용서했지만, 그 극악함에 분노하는 데 폭력적일 만치 분명했다. 이를테면 예수는 타락한 성직자들과 뒤로 결탁하한 장사치들을 성전에서 한번에 쫓아낸다. 갈릴리 출신의 별볼일 없는 청년은 단지 자애로운 얼굴로 "여러분의 행동은 부적절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일을 성공할 수 있었을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태 23:33)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은 '끝내 용서하되, 분명히 분노하는' 방식으로 점철된다. 예수가 결국 정치적 혁명가의 혐의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은 바로 예수의 그런 독특한 지점을 드러낸다.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었지만 그의 행적은 늘 정치적 혁명가로 오해받곤 했다. 예수는 끝내 용서하되 분명히 분노했으며, 정치적 해방을 구원으로 삼지 않았으되 매우 정치적이었다. 그것이 예수가 단지 분노하지 않거나 단지 정치적이지 않을 뿐인 얼치기 도사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며, 끝내 용서할 줄 모르거나 정치적인 해방을 구원으로 삼는 하고많은 혁명가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역사적 격변 앞에서 얼치기 도사들은 '깨우침'으로써 비루하고 덧없는 현실을 '초월'한다. 그러나 예수나 부처와 같은 가장 위대한 성인들은 도리어 '깨우침' 이후에 그 비루하고 덧없는 현실에 자신을 녹여 넣곤 했다. 그 비루하고 덧없는 현실 속에, 그 비루하고 덧없는 현실에 얽메어 살아가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서러운 가슴 속에 우주와 생명의 이치가 있다.(한겨레 20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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