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6/08 15:45
집 근처 언덕배기에 뚝딱뚝딱 무슨 놀이공원이나 영화 세트장 같은 걸 짓는가보다 했더니 그게 “경기영어마을 파주캠프“란다. 평일에도 노상 주차장이 빈 곳이 없고 주말엔 말 그대로 인산인해다. 집과 사거리를 두고 떨어졌기 망정이지 조금만 가까웠다면 꼼짝없이 관광지 원주민 꼴이 될 뻔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커다란 광고판을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 영어마을”

내 친구 규일이는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몬다. 그야말로 늘 영어만 쓰는 일이고 물론 영어를 잘 한다. 그런데 규일이는 제 딸에게 따로 영어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 규일이의 지론은 “영어는 일년이면 된다, 애 괴롭힐 것 없이 나중에 필요하면 하면 된다” 는 것이다. 그건 괜한 소리가 아니라 규일이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학교 다닐 때 영어를 못하는 축에 속했지만 서른이 넘어 일에 필요해지자 몇 달 바짝 공부해서 필요한 실력을 만들었다.
내 경우는 한 때 번역일로 먹고산 이력이 있으니 영어를 아주 못하는 편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잘하는 편도 아니다. 그러나 외국에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미국은 저희들 대사관 앞에 줄 세우는 수작을 지속하는 한 갈 일이 있어도 안 가고 살기로 했으며 글을 쓸 때 참고 문헌을 보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큰 불편은 없다. 영어공부를 좀 더 하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그럴 시간이면 차라리 아이와 산책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유엔 같은 데서 영미권이 아닌 나라의 대표가 연설하는 풍경을 보면, 혹은 역시 영미권이 아니면서 세계적인 존경을 받는 지성이 영어로 말하는 걸 보면 공통점이 있다. 발음이 ‘안 좋’다는 것이다. 문장들은 다들 개성 있고 유려하나 발음만은 하나같이 제나라식이다. 우리처럼 아이 혀를 째서라도(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미국인 발음을 흉내 내려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다.
후배가 제 동무들과 인도 여행을 하다가 그곳 청년들과 며칠 동행했다. 서로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그들의 영어 발음이 영 ‘안 좋’더란다. 후배 패거리들은 짐짓 우쭐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헤어지는 날 인도청년들이 빈정거리듯 말하더란다. “너희 나라, 아직 독립 안 했냐?”
영어공부는, 다른 모든 공부가 그렇듯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건 그게 미국말이라서가 아니라 오늘 실제적인 국제공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어 발음이 미국사람들과 얼마니 비슷한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문장은 제대로되 발음만은 (알아들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제 나라식으로 하는 게 훨씬 더 온당하고 품위 있다.
요즘 한미 FTA 문제로 세상이 시끄럽다. FTA로 미국과 경제가 통합되면 삼성을 비롯한 몇 개 재벌은 낙원에 이르게 되지만(그래서 FTA를 하려고 안달이지만) 중소기업과 대다수 서민들의 삶은 끝장이다. IMF 이후 가속화한 한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완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의 모든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서 인류를 지옥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유독 한국에서는 마치 인류의 빛나는 미래인양 찬미되어 왔다. “대한민국의 미래, 영어마을”이라는 구호처럼.
왜 그리 영어교육에 집착하느냐고 물으면 한국 부모들은 대답한다. “내 아이는 세계화된 세상에서 한국인이 아니라 지구인으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글쎄. 세계화된 세상에서 지구인으로 살 거라는 건 맞다 치자. 그러나 세계화한 세상은 대개의 사람들에게 ‘세계화한 지옥’일 것이다. 하긴, 지옥에서도 말은 통해야 하니. 발음도 ‘좋’아야 하고!
2006/06/08 15:45 2006/06/08 15:45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809

  1. Subject: 영어

    Tracked from JAEYOUN.Tistory.com 2006/06/08 20:39  삭제

    대학을 졸업한 후에야 알게 된 상식이 있다. 대한민국의 웬만한 회사는 공인 인증 영어 성적이 없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사실. 밥을 벌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기에 그래도 영어 시?

  2. Subject: 영어단상

    Tracked from 좁은 길, 낮은 마음 2006/06/12 23:27  삭제

    영어 단상내 친구 규일이는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몬다. 그야말로 늘 영어만 쓰는 일이고 물론 영어를 잘 한다. 그런데 규일이는 제 딸에게 따로 영어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 규?

  3. Subject: 김규항 인터뷰 후기.

    Tracked from 나무그림 작나무 2006/06/20 23:39  삭제

    김규항 선생님 인터뷰하러 갔다가 왔는데 병원에 입원하고 어쩌고 하느라고 한동안 미루다가 이제야 정리. 인터뷰어는 너부리님이시고, 작나무는 사진 찍는다고 두리번거리고 산만하게 왔다?

  4. Subject: 영어에 대한 단상

    Tracked from 文學! What is it? 2006/11/10 02:11  삭제

    평소에 내가 영어에 대해 느끼고 있었던 부분을 잘 꼬집어준 글이다. 김규항 선생은 평소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그의 글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서 이런 저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