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5/02 18:18
윤구병 선생. 몇 해 전 나를 불러 “작은책을 도우라”시기에 “여부가 있겠습니까” 해놓고선 몇 번 못하고 고래에 치어 슬그머니 빠져나왔었다. 교수 출신으로 주류체제를 거부하고 농사지으며 산다는 점을 놓고 선생을 스코트 니어링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몇 가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성분(거지 출신), 외모(민중적 마스크), 고독(헬렌이 없다).. 그러나 그 모든 다름을 뛰어넘는 다름은 다름 아닌 '귀여우심'..ㅎㅎ. 오랜 만에 선생의 글을 읽었는데 여전하시다.



“돈 없어도 살 수 있다.”
“아니, 돈이 없어야 더 잘 산다.”
“돈 없는 세상 만들어 보자.”

내가 가끔 우리 공동체 식구들한테 하는 말이다. 우리 공동체 식구들은 대체로 젊고 순수한 데다가 도시에서 돈 문제로 꼭지가 돈 적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내 말을 그럴싸하게 듣는다. 그러나 정작 도시에서 떠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내 마누라, 내 자식들한테 같은 이야기를 할 때 씨알이 먹힐까? 어림도 없는 수작이지.

먹을 것, 입을 것, 집세, 전기세, 물세…… 돈으로 틀어막아야 할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그러지 않으면 하루도 온전하게 살아남기 힘든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이렇게 제 새끼, 제 여편네한테도 인정받지 못할 무책임한(?) 소리를 함부로 지껄이고 다닌다고 욕먹어도 싸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거두어들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오래된 미래’에 살았던 라다크 사람들 호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었어도 사람답게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지금부터 100년 전 우리 나라 마을 공동체에 살던 사람들 거개가 고의춤에 엽전 한 냥 없었어도 사람의 모습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 말마따나 돈은 교환가치가 지배가치가 된 상품경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가 나타나기 훨씬 전에도 있었다. 그리고 돈이 사람에게 독만 되는 게 아니라 이로운 일을 하는 때도 있다는 걸 나도 인정한다. 물물교환이 생각보다 훨씬 더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나는 돈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누군가 또 이렇게 묻겠지. 그러면 원시공산제 사회로 돌아가자는 말이냐? 좋게 말해서 노자가 이상으로 여긴 ‘창과 칼을 녹여 호미와 곡괭이를 만들고, 날랜 장수, 머리 비상한 학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지고, 개 짖는 소리, 닭이 홰치는 소리 들리는 이웃 마을에도 오갈 일이 없는 그런 조그마한 마을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거냐? 그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자는 수작이 아니냐?

아니지, 그건 아니야. 이런저런 이야기 다 늘어놓다 보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지경인데, 아주 간단하게, 너무나 간단해서 정나미 떨어지게, 돈이 왜 없어야 하는지, 모두가 돈벌이에 눈이 먼 이 세상이 왜 망할 세상인지 꼽아보자.

첫째, 모든 생명체는 생명 에너지를 동력으로 살고 있다. 사람도 지난 200년 전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은? 물질 에너지(석탄, 석유, 원자력 들)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고, 생명 에너지조차 물질 에너지로, 기계화한 동력으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살 길이 없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이 반생명적인 세상은 얼마 안 되는 자본가 손아귀에 집중된 돈이 만들었다.(국가 화폐든 국제 화폐든 모든 돈은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계급사회를 키워내고 유지시키는 원동력 구실을 한다.) 물질 에너지에 의지해서 사는 현대인은 더 이상 생명체로 볼 수 없다.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반은 괴물이다. 석유 먹고, 석탄 먹고, 원자력 먹고 사는 이 이상한 짐승들을 어떻게 온전한 뜻에서 생명체로 부를 수 있겠는가?

둘째, 현대의 바벨탑인 거대도시들(중소 도시들도 마찬가지지만)은 돈이 없으면 한순간도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200년 전에 출현한 ‘현대인’이라는 괴물을 빼고 이 자연계에 돈 없으면 살지 못하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다. 생명체 본디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도 돈이 없어져야 한다. 물질 에너지에 의존해서 사는 데에 길든 사람들, 특히 도시인들에게 이 말은 끔찍한 저주로 들릴 것임을 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모든 도시 문명은 멸망하기 마련이고, 그 까닭도 꼭 같다는 것을 알까?

셋째, 모든 생명체는 삶의 영역이 한정되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두 뒷발로 몸의 균형을 유지해서 곧추서고 두 앞발을 마음먹은 대로 놀려 살 수 있게 생체가 구조화된 것은, 새처럼 하늘 높이 날거나 사슴처럼 날래게 뛰지 않고도 그 느린 발걸음으로 하루 여덟 시간 걷는 범위 안에서 살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십만 년을 살아왔던 인간이 왜 갑자기 지난 200년 사이에 이리 뛰고 저리 달리고, 태평양을 날아서 건너고 인도양을 화물선에 실려 건너야 살 수 있는 존재로 바뀌고 말았는가? 그렇게 밤 새워 온 세계를 누비고 다녀도 언제 처자식들과 길거리에 나앉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가련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돈을 쫓아다니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고, 돈이 생체 구조를 뛰어넘어 겨드랑이에 인공의 날개를 달고, 뒷발에 바퀴를 붙이게 부추긴 것이다.

사람이 생명체로서 제 모습을 잃어 버렸다는 것은 더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산다는 게 뭔가? 생명체로서 제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제 힘으로, 생체 에너지만으로 살 길을 연다는 것이다. 사람이 제 모습을 되찾으려면 지금이라도 ‘편리한 물질 에너지’의 마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불편하지. 힘들지.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되돌림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지. 그럴 거 아냐? 다시 실 잣고, 베 짜고, 미투리 삼고, 새끼 꼬고, 구들 놓고, 꼴 베고, 김 매고, 철철이 씨 뿌리고, 거두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생체 에너지를 교환하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찾는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이야? 안 그래?

얼마 전에 우리 공동체에 살러 들어온 사람이 하나 더 늘었는데 이 사람 직업이 교사야. 경력이 오래 되어서 한 달 급료가 3백만 원이 넘는대. 3백만 원이면 나 같은 얼치기 농사꾼이 한 해 농사지은 곡식 다 내다 팔아도 손에 쥘 수 없는 큰 돈이야. 그런데도 그 좋은 직장 마다하고 돈이 발붙이지 못하는 마을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어찌 보면 허황한 꿈을 꾸는 노인네가 사는 곳으로 온 거야. 이 말을 처음 듣고 잠깐 공동체에 몸 붙이고 있던 어떤 애 엄마가 대뜸 얼굴빛이 바뀌면서 이렇게 외치더래. “아 유, 크레이지?” 이 말은 “아유, 그래야지요”가 그렇게 들린 게 아니라 영어인데 우리 말로 바꾸면 “당신 미쳤수?”라는 말이래. 나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봐.

나한테 이렇게 손가락질할 사람도 있어. “지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빌붙어 잘 먹고 잘 살아 왔으면서, 그리고 지금도 그 돈에 기대 공동체를 일구어 가고 있으면서 ‘돈 없어도 살 수 있다’는 흰소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어. 야바위 놀음으로 사람들 꼬이는 고등사기꾼 아냐?” 할 말이 없어. 아니 땐 굴뚝에서 나는 연기가 아니거든. 부끄럽지. 아예 학교 문턱 다시 밟지 못하게 하고 농사꾼으로 기르려고 했던 우리 노친네 소망 어기고 저 잘난 맛에 돈 없이는 사람 구실 못하는 세상 이리저리 떠돌다가 나이 쉰이 넘어서야 이게 아닌데 싶어 반거충이 농사꾼이 된 지 이제 갓 10년이 넘은 주제에 터진 입이라고 주저리주저리 함부로 이런저런 말 지껄이고 있는 내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한심한 구석이 있어.

그렇지만 이 말만은 덧붙이고 싶어. 이 세상에 사람 빼고 죄 짓고 사는 생명체가 없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생명체를 해치지 않는 게 생명계의 불문율이나 마찬가진데, 사람만이 이 불문율을 지키지 않으니, 그럴 뜻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을 못 살게 하는 짓을 진보와 발전으로 미화시키기까지 하니, 요즈음 사람으로 사는 죄 말할 수 없이 크지. 해가 갈수록 그나마 가장 죄를 덜 짓고 사는 길은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옛날 우리 아버지, 그 아버지 어머니, 그 어머니들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았던 그 시절 그 삶의 길로 접어드는 거.

역시 짐작했던 대로라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중세로 되돌리는 거라고? 아니야.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자는 거야. 바른 삶의 길을 걷자는 거지. 우리 민중들이 그동안 흘린 피가 밑거름이 되어 우리는 중세의 신분제 사회라는 야만의 굴레에서 벗어났잖아. 자본 세상, 국가 권력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는 꿈을 가진 이들이 먼 미래에 그리던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앞당기는 길이 돈 없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고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어. 나보다 더 눈 밝은 이들이 싸움 속에서 자기를 던져 얻은 깨우침의 말을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뿐이야.
2006/05/02 18:18 2006/05/0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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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돈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만...

    Tracked from 따듯할 On 2006/05/06 00:21  삭제

    돈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 gyuhang.net 돈없는 세상에서 살고싶어 하는 동지를 또 만났지만 마음이 한구석 편치 못하다. 나이가 차도록 부모님 고생시키는 내 자신의 못남때문이기도 하고 사랑

  2. Subject: 복잡한 세상

    Tracked from 상상력은 나의 근육이다 2006/05/10 15:51  삭제

    다달이 그냥 앉아만 있어도 들어가는 돈이 꽤 된다. 각종 공과금에 보험금, 정기 적금, 적립식 펀드. 인터넷에 접속해서 '돈 없이 살자'는 주장의 글을 읽으려 해도 인터넷 사용료를 내야 한다. ?

  3. Subject: 돈 없는 세상에서

    Tracked from 좁은 길, 낮은 마음 2006/05/12 00:07  삭제

    과아연 살 수 있을까?

  4. Subject: 돈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Tracked from 스튜엇 리를님의 블로그 2006/05/14 22:46  삭제

    고민거리.

  5. Subject: 돈없는 세상에서 살고싶다.

    Tracked from 초록머리 앤 2006/05/15 01:02  삭제

    돈없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