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6/20 17:37
“어떤 이유에서인지, 빤질빤질하고 좌충우돌하는, 거의 만능에 가까운 조숙한 ‘아이-어른/어른-아이’들이 90년대 소설의 전형적인 주인공상이 되었다. 그런 허장성세형의 인물들이 90년대 초입에 대거 등장한 까닭을 나름으로 풀이하자면 이런 것이 될 것이다: ‘기존의 가치는 폐기되었고, 새로운 질서는 도래하지 않았다.’ 신세대 소설에 등장하는 만능인은, 베를린 장벽과 크레믈린이 일시에 녹아버린 어느날 갑자기 태어났다. 8•15를 예견하지 못했던 일제시대의 지식인과 비유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자기 시대의 맹인들이었으나, 그들을 관통한 세월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실제 경험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체하게 해주었다. 문화형성이니 모조현실과 같은 거품의 사유가 아니라 진지하게 실존에 대해 사고할 절호의 기회가 90년대 신세대에게 주어졌으나, 한번도 실존의 삶을 교습받아 본 적이 없는 신세대식 실존주의는 치기어린 ‘육백만불의 사나이’들을 그들이 쓴 소설나부랭이 곳곳에 게워 내 놓았다.”(장정일, 독서일기 3)

장정일(소설가지만, 나는 그의 산문에서 문학이 정신세계의 꼭대기에 있던 시절에나 볼 수 있던 통찰을 발견하곤 한다)의 의견에 공감한다. 덧붙이자면 바로 그 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영화가 유례없이 번창하게 된 사연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베를린 장벽과 크레믈린이 일시에 녹아버린 어느날 갑자기” 한국 청년들은 대거 현실을 떠나 영화로 도망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80년대 청년들 덕이었다. 한국사회 특유의 현실비판적 청년정신은 80년대에 폭발했다. 80년대 청년들에게 세상을 바꾸는 일은 곧 실존의 확인이었다. 인류가 축적한 현실변혁에 관한 모든 아이디어가 빠짐없이 동원되었고 수많은 청년들이 거침없이 현실 속으로 투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허약했다. 90년대가 되어 동구가 무너지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되자 그들은 순식간에 청산을 택했다. 거침없이 현실 속으로 투신하던 그들은 자신을 모욕하는 일에도 거침없었다. 80년대 청년들의 졸렬한 청산은 90년대 청년들에게 생생히 목격되었다.

세대간의 존경으로 이어져온 청년정신은 80년대와 90년대 사이에 완전히 단절되었다. 90년대 청년들은 80년대 청년들을 존경하지 않았다.(자신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을 누가 존경할 수 있었겠는가.) 90년대 청년들은 80년대 청년들의 가장 큰 특징이라 여겨진 ‘현실에 대한 관심’을 거부했다. 90년대 청년들은 비정상적일 만치 현실에 무관심한 특징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신실한 자본의 신도(이기심을 구현하는 일이 구원의 길이라 믿는)이자 반동의 신도(인간은 본디 이기적이며 세상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믿는)로 살게 된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비정상적일 만치 현실에 무관심한 90년대 청년들은 ‘현실과 가장 닮은 가상현실’, 영화로 도망했다. 말하자면 90년대 청년들에게 영화는 실종된 현실의 대체물이다. 80년대 청년들이 현실에 정열을 발산했듯 90년대 청년들은 영화 속의 현실에 정열을 발산한다. 현실에 비정상적일 만치 무관심한 그들은 영화 속의 현실엔 더할 나위 없이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러나 극장을 나서는 순간 그런 개입의 경험은 그들에게서 흔적없이 증발한다. 그들은 다시 신실한 자본의 신도이자 반동의 신도의 삶으로 돌아간다.

이상이 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영화가 유례없이 번창하게 된 사연이다. 오늘 한국영화는 번창할 뿐 아니라 진보하고 있다. 알다시피 그런 진보는 거의 전적으로 10여년 전 영화에 대거 투신한 80년대 청년들의 성과다. 그들이 이제라도 그들 손으로 이룬 영화의 진보가 90년대 청년들이 현실에서 도망하는 수단의 진보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되새기길 바란다. 그들이 잃어버린 존경을 되찾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기를 바란다. 그것은 80년대 청년들이 90년대 청년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사과가 될 것이다.(씨네21)
2001/06/20 17:37 2001/06/20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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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영화로 도망하다

    Tracked from lunamoth 3rd 2004/11/07 14:28  삭제

    비정상적일 만치 현실에 무관심한 90년대 청년들은 ‘현실과 가장 닮은 가상현실’, 영화로 도망했다. 말하자면 90년대 청년들에게 영화는 실종된 현실의 대체물이다. 80년대 청년들이 현실에 ?

  2. Subject: 영화 속 역사 의식, 사토 마코토 감독님, 방송과 다큐멘터리 등등.

    Tracked from m i t h r a n d i r . c o . k r 2004/12/04 23:48  삭제

    0. 지난 주말 사토 마코토 감독님과 함께 했던 자리에 대해 적어놓은 글을 다시 읽어보니, "배움의 기회"를 다 날려버리고 쓰잘데없는 잡답밖에 못해본 아쉬운 자리인 것 처럼 적혀있더군요. 근?

  3. Subject: Rechtsanwalt Daniel Sebastian

    Tracked from Rechtsanwalt Daniel Sebastian 2013/04/20 20:12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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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Subject: Waldorf Fro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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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Subject: speaking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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