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4/14 16:06
권 장로가 성경 갈피에 미리 넣어 둔 자루 없는 커터 칼날로 배를 세 번 긋고 변기 뚜껑을 깬 것은 새벽닭이 울기 전이었다. 칼날은 5센티미터 깊이까지 들어갔으나 권 장로의 피하지방(비계)이 그보다 더 두꺼웠기 때문에 내장은 상하지 않았다. '자살기도'냐 '자해공갈'이냐 하는 정치평론보다는 "국산 칼날 문제 있다" 따위의 조크가 더 어울리는 사건이었다. 어쨌든 나라를 콩가루로 만든 김 장로에 이어 또 한번 교회 장로가 사고를 침으로서 기독교인들은 민망하게 되었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이하 유토피아)는 이 사건을 주제로 두 목회자의 대담을 마련했다. 참석자는 응답교회 은혜만 목사와 낮은교회 지하로 목사이다. 은 목사는 유신 무렵, '영도자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창안하여 급부상한 이래 공격적인 교회경영으로 고속성장을 거듭해 온 유력한 목회자다. 지 목사는 악명 높은 철거깡패 출신으로 뒤늦게 목사가 되어 빈민선교에 전념하고 있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지면에 옮기기 거북한 부분도 그대로 두었음을 밝혀 둔다.

유토피아: 이번 권 장로 일로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지탄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지하로: 교회가 국민들과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아까 테레비에서 보니까 그 양반 오늘 구속이라는데 예배를 보고 있더라구요. 열 받아서 테레비를 뽀개버릴 뻔했어. 사실 전부터 대공이니 공안이니 오바하는 존만 새끼들 중에 집사가 많았거든. 여대생을 취조한다고 잠지를 까고 지랄한 문귀동이라든가... 존만 새끼들.
은혜만: (잠시 묵상하고) 우리 성도들은 아무래도 좀 뜨겁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많아 보이는 거지, 실제론 불교신도가 많을 걸요. 권 장로님 일은 저도 유감입니다만, 여론이 안 좋다고 같은 성도끼리 돌을 던진다면 종교탄압을 자초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유토피아: 북풍사건은 특정 대통령 후보를 빨갱이로 몰기 위해 북쪽과 내통을 했다는 게 충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은혜만: 그게 말이죠, 제가 정치탄압 받을 각오하고 하는 말인데요, 지금 교회 욕하는 사람들 전부 그 후보 찍은 사람들이에요. 전라도가 원래 좀 그렇잖아요. 서울만 해도 강남은 분위기가 다르다고 봐요. 그리고 빨갱이 하나 잡는 게 열 명 전도하는 거보다 은혜예요. 나도 실향민이지만 적화통일 돼봐요. 교회가 어딨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수호돼야 신앙의 자유도 있는 거예요.
지하로: 그래서 북한하고 내통했어요?
은혜만: 제가 국제적으로 활동하다 보니까 정보력이 좀 돼요. 이거 정보망 무너지는 거 각오하고 하는 말인데, 권 장로가 북쪽하고 접촉한 건 선교 목적일 가능성이 높아요. 권 장로님이 워낙에 뜨거워요.
지하로: 북한선교라. 완존 예술이구만. 권 장로가 자기를 패장이라고 했다는데 그렇다면 지가 성전(聖戰)을 치루고 있다는 건데, 완존 또라이야. 그럼 누가 얘를 또라이로 만들었냐, 권 장로고 문 집사고 교회가 목사가 그렇게 만들었다 이기야.
은혜만: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그 두 사람은 저희 교회 교인이 아녜요.
지하로: 돌아버리겠구만. 오늘 고명하신 은 목사님 만난 김에 하나만 물어 봅시다. 기독교가 모세를 믿는 거요, 예수를 믿는 거요?
은혜만: 허허허, 그거야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지. 무슨 그런 싱거운 말씀을.
지하로: 싱거? 그런데 은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면 예수가 말한 거하고 반대가 많거든. 은 목사님은 열심히 믿으면 물질축복 받는다고 하는데,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가기보다 어렵다고 했단 말야. 나는 이 생각만 하면 돌아버려. 이거 이해시키시면 내 쓰바 오늘 당장 낮은교회 엎어버리고 응답교회 나가겠시다.
은혜만: 성경 말씀은 영적인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효도하면 당연히 효행상 받아야죠. 제가 안기부 특강도 하고 그럽니다만 성도가 가난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게 다 뒤에 불온한 게 있는 거예요. 퍼런 수박 쪼개 봐요. 빨갛잖아요. 그건 그렇고 저는 내일 아침 청와대 조찬기도회 준비 땜에 일어나야겠습니다만, 솔직히 이번 권 장로 일이야 석 달만 지나면 누가 기억이나 합니까. 미국 보세요. 기독교니까 반공하니까 축복 받은 거고, 소련은 망했잖아요. 이번 일이 종교탄압으로 흐르지 않도록 성도들이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유토피아: 저도 오늘 유명 영상지 원고 마감이라서요. 아쉽지만 지 목사님 간단하게 정리 말씀하시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하로: 먼저, 제가 오늘 욕하고 그런 거 미안합니다. 어제 철거반 새끼들 땜에 밤을 샜더니... (잠시 묵상 후) 교회가 그리스도의 정신, 십자가 정신을 살려야겠습니다. 그게 없으면 교회는 죽는 겁니다. 예수는 "니꺼 남 주는 게 사랑이다, 너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라" 그랬는데 교회는 "믿으면 잘 살 수 있다, 남에 꺼 먹을 수 있다"고 가르치니 이게 다 죽은 교회란 말이에요. 만날 교회만 나가면 뭐해요. 다 헛지랄인데. 예수가 알면 통곡을 할 일이죠. 점잖은 양반들이 나 같은 깡패새끼도 아는 이치를 모르다니 말이 됩니까. 이번 일이 정말로 교회가 십자가 정신을 살리는 계기가 되어야겠습니다.
유토피아: 두분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치겠습니다.
은 목사는 대기 중이던 승용차로 바삐 떠났고, 원고 마감이라던 유토피아는 소주 한잔 걸치자는 지 목사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섰다. 서울의 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네온사인 십자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만 갔다. | 씨네21 1998년_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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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rainygirl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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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가 사회철학이 아니라 개인영달의 술수가 되면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망각되고

  2. Subject: Indian Tech Support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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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Subject: Itunessto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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