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12 00:10
소시 적, '세계명작'을 좋아해본 적이 없다. 늘 조금 읽으면 읽기 싫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절반은 번역문체 때문이었고 절반은 내 어떤 감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민족 감성’ 같은 건 아니다. 배웠다는 놈이면 다 좋아한다는 태백산맥도 앞에 조금 읽다 말았고 조선식 구라가 흘러넘치는 장길산도 채 5권을 못 넘겼다. 그 작품들이 명작이라는 의견을 굳이 반박하고 싶진 없지만 나는 그 작품들에게서 매혹될 순 없었다. 그런 문학적 궁핍 속에서 베른하르트를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그의 <소멸>이 나온단다. 출판사에서 책 표지에 넣을 추천사를 써달라기에 기꺼이 수락했다. 무려 500페이지가 넘는, 그러나 딱 두 문단인 소멸의 교정지를 작업실 귀퉁이에 쌓아놓았는데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추천사 초고. 뭔가 빠진 듯한데 뭐지..?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지성이란 실은 혐오를 기반으로 한다. 왜냐하면 지성이란 지적인 것들의 축적도 지적 행동의 조합도 아닌 ‘세계에 반응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말했듯 여느 사람들이 제 앞의 문제에만 반응할 때 지성을 가진 사람은 세계의 문제에 반응한다. 그래서 지성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심지어 혁명에 투신하는 순간에도, 혐오를 품고 있게 마련이다. 나는 베른하르트에게서 지성의 정점을 본다. 그는 우파로 하여금 제 속물성을 자인하게 하며, 좌파로 하여금 제 이상의 결핍을 보완하게 한다.
2005/12/12 00:10 2005/12/1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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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김규항의 &#39;소멸&#39; by 베른하르트 추천사 초고

    Tracked from resist architecture and ... 2005/12/14 09:08  삭제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지성이란 실은 혐오를 기반으로 한다. 왜냐하면 지성이란 지적인 것들의 축적도 지적 행동의 조합도 아닌 ‘세계에 반응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말했듯 여?

  2. Subject: 재개

    Tracked from 글리브 엽서 2005/12/29 08:48  삭제

    &nbsp; &nbsp; &nbsp; 결국 wireless 인터넷 서비스를 신청하고야 말았다. 육개월 무임승차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