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6/27 12:18
예비군을 넘어 민방위훈련 마친 지도 오래지만, 이따금 행군하는 병사들이라도 만날라치면 여전히 속이 울컥한다. 그들은 이른바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모든 청춘의 권리를 징발당한 채 꼬박 두해를 묶여 지내는데 그놈의 조국은 전혀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조국이 아니다. 청년들은 그런 어이없는 조국을 위해 두해를 보내다 어이없이 다치거나 죽곤 한다. 연천의 지피에서 다시 여덟 명의 청년들이 죽었다. 나도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보고 동료가 죽어나가는 걸 보기도 했지만, 이번 연천 사고는 그간 한국 군대에서 일어나 온 총기 사고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 든다. 사건에는 분노나 원한보다는 어떤 ‘정처 없는 담담함’이 짙게 흐른다. 이번 사건은 오히려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일어났던 총기난사 사건과 닮았다. 아직 수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8명의 동료를 죽일 만한 이유’가 나올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결국 이 사건은 ‘극히 비정상적인 개인’의 문제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다. 돌아가는 정황도 그렇고 정부당국 입장에서도 그게 가장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극히 비정상적인 개인’이 원인이라 여겨지는 바로 그 이유에서 이 사건은 ‘극히 사회적’이다. 질문을 하나 해보자. 당신은 미국 고등학교의 총기 난사 사건이 또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는가? 대개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사건의 원인이 바로 미국 사회에 있다고 믿고, 미국 사회가 변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얼마간은 예비 살인자다. 살면서 한 뻔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욕구를 느껴보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실제로 살인하지 않는다. 그건 바로 사회가 그런 욕구를 억제하기 때문이다. 살 만한 사회일수록 정의와 평화가 존중되는 사회일수록 그런 억제력은 높다. 그러나 미국은 정반대의, 차별과 폭력이 난무하고 정의와 평화가 실종된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정신의 거처’를 찾지 못한 아이들이 쉽게 총을 구할 수 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은 오히려 적다.

연천 사건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은 어떤 사회인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반대하기는커녕 빌붙어 군대를 보내는, 그런 정책을 강행하는 정권이 민주화운동의 계승자이자 수구세력과 싸우는 개혁세력이라 불리는 사회에서 정의와 평화는 어떤 가치인가? 민주화 이후 새로운 주인이 된 자본과 상업주의에 사로잡혀 돈이면 사랑이나 존경마저 살 수 있다고 여겨지는, 부모들이 제 아이를 오로지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미쳐 돌아가는, 애국심은 국가 대표 축구팀의 성적으로나 보충되는 사회에서 어린 청년들은 대체 무엇을 존경하고 대체 어디에서 품위 있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그렇게 정신의 거처를 잃어버린 청년들이 무기가 옥수수처럼 주렁주렁 매달인 공간에서 꼬박 두해를 보낼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어쨌거나, 사건은 마무리될 것이고 정부당국은 무기 관리를 철저히 한다느니 병영생활을 합리화한다느니 하는 그럴싸한 후속 대책들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분석과 대책들은 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문제는 무기 ‘관리’나 병영생활의 ‘합리화’가 아니라 무기와 병영생활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많은 관심을 갖지만 언제나 그렇듯 얼마 지나고 나면 다들 새로운 화젯거리로 몰려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사건이 군대 내 총기사건의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살 만한 사회로 변하지 않는다면 정의와 평화가 넘쳐흐르지 않는다면, 여전히 축구경기에서나 애국심을 보충해야하는 사회라면, 정신의 거처를 잃은 어느 청년은 다시 담담한 얼굴로 수류탄과 총을 집어들 것이다.
2005/06/27 12:18 2005/06/27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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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총기난사사건이 무엇 때문이라고?

    Tracked from ozzyz's review 2005/06/29 00:21  삭제

    우리 사회의 코끼리 - 군대문제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거실에 코끼리가 한 마리 들어와 있었다. 처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코끼리의 몸집은 비대해져갔고, ?

  2. Subject: 연천 단상

    Tracked from 신용철, 문턱넘어 바느질뜨기 2005/07/04 18:16  삭제

    <DIV class=title>연천 단상</DIV>

  3. Subject: 김규항, 연천 단상

    Tracked from 신용철, 문턱넘어 바느질뜨기 2005/07/04 18:29  삭제

    <DIV class=title>연천 단상</DIV> <DIV class=title>

  4. Subject: 집쥐의 변명.

    Tracked from Review 2005/08/11 02:58  삭제

    저번 김일병 사건에 대한 대다수 예비역들의 반응은 우리나라가 국가규모의 거대한 병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병영에 대한 문제점을 꼬집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