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3/17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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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살아있는(아직 자살하지 않은) 우리는 ‘과연 살아 있는 건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일하러 나간다. 그런데 그러면 살아있는 것일까? 우리의 몸에 피가 흐르고 움직이고 생각한다 해서 살아있는 거라 규정하는 건, 인류가 적게 잡아 수천 수만 년 동안 고민하고 축적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비추어 참으로 치졸한 수작이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건 인간으로서 위엄을 유지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를테면, 잠자는 시간만 빼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만 궁리하는 인간은 전혀 살아있는 게 아니다.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걸 행복해 하는 인간은 전혀 살아있는 게 아니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인간이란 모든 생명을 내 생명과 다름없이 여기며,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걸 죄스러워 할 줄 아는, 더 갖는 일엔 아무런 관심이 없이 남에게 더 줄게 없나에 골몰하는 그런 인간이다. 과연 우리는 그런가? 우리는 대개 이미 죽었거나 반쯤 죽은 인간들일 뿐이다.

(원문)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 즉 자살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은 이런 것이다. “죽을 용기로 더 열심히 살아야지.” “생명은 소중하기에 스스로도 포기할 권리는 없어.” 이런 의견들은 윤리나 종교 형태로 명문화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근본주의적인(스스로는 ‘복음주의’라 주장하는) 기독교에서 자살은 ‘지옥불에 떨어지는 일’이다. 최근 개봉한 ‘콘스탄틴’이라는 영화에도 자살한 이자벨이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자살에 대한 그런 의견들은 대개 한 가지 목적을 갖는다. ‘자살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이란 오로지 살아있는(아직 자살하지 않은) 사람들의 자살을 막으려는 것이다. 거기엔 죽음에 대한 본능적 공포(인간에게 확실한 건 두가지뿐이다. 죽는다는 것, 그리고 그게 언제일지 모른다는 것.)와 함께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할 경우에 치러야 할 고통(사랑하는 사람의 잃은 고통에, ‘자살에 이르게 한 책임’까지 추궁 당하게 된다.)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결국 살아있는(아직 자살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자살 금지’라는 팻말 아래 모여서야 비로소 안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살’에 대해 말하는 것과 ‘자살한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을 혼돈한다. 그러나 ‘자살’에 대해 말하는 것과 ‘자살한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자살에 대해서라면, 자살한 사람들 대부분도 본디 자살을 지지하진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오히려 앞서 말한 자살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일반적인 차원에서 자살을 반대하면서, 자살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두고 자살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의견을 암송할 게 아니라 그들의 ‘선택’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그들의 ‘선택’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이지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완전히 알 도리가 없다. 자살하는 사람의 일부는 유서를 남긴다. 그러나 그 유서란 이미 죽음을 결정한 상태에서 쓴 것이라 그 선택에 대한 설명으론 부족하기 마련이다.(대개의 유서란 ‘미안하다’는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의 선택은 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우리는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자살을 반대하는 사람이 그들의 ‘선택’을 애써 이해하려 하거나 지지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우리가 그렇게 하길 바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오로지 살아있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비난해선 안 된다. 우리는 제 아무리 가슴 아픈 수사로 포장하더라도 그들의 선택을 비난해선 안 된다. 그들은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한(자살하지 않기로) 우리에게 그들의 선택을 권하거나 지지해 주길 바라기는커녕 그저 미안해할 뿐인데, 우리는 왜 우리와 다른 선택을 한(자살하기로 한) 그들을 비난하는가? 우리가 ‘이미’ 자살한 사람에게 할 일은 비난도 지지도 아닌, 존중이다. 만일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자살을 시도했다면,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그가 힘을 내서 살아가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떠났다면 그의 선택을 조용히 존중해야 한다.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파헤치려하지도 말고 그 선택엔 진지하고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해야 한다.

자살한 사람에 대해 말하기 전에, 살아있는(아직 자살하지 않은) 우리는 ‘과연 살아 있는 건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일하러 나간다. 그런데 그러면 살아있는 건가? 우리의 몸에 피가 흐르고 움직이고 생각한다 해서 살아있는 거라 규정하는 건, 인류가 적게 잡아 수천 년 동안 고민하고 축적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인문적 질문에 비추어 참으로 치졸한 수작이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건 인간으로서 위엄을 유지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를테면, 잠자는 시간만 빼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만 궁리하는 인간은 전혀 살아있는 게 아니다.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걸 행복해 하는 인간은 전혀 살아있는 게 아니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인간이란 모든 생명을 내 생명과 다름없이 여기며,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걸 죄스러워 할 줄 아는, 더 갖는 일엔 아무런 관심이 없이 남에게 줄게 없나만 골몰하는 그런 인간이다. 과연 우리는 그런가? 우리는 대개 이미 죽었거나 반쯤 죽은 인간들일 뿐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오늘 당장 잃어버린 위엄을 회복하고 사람답게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는 시간을 빼곤 죽은 시체와 같다. 그런 우리가 어찌 이 욕된 삶을 스스로 마친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매일 자살하는 우리가 어찌 단 한번 자살한 그들을 두고 훈계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자살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우리의 자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자살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의견을 우리 자신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죽을 용기로 더 열심히 살아야지.” “생명은 소중하기에 스스로도 포기할 권리는 없어.”
2005/03/17 12:12 2005/03/17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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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쿨'한 자살관, '쿨'하지 않은 자살

    Tracked from 반달, 습작. 2005/03/17 13:03  삭제

    배우 이은주 씨가 죽은 후 '자살'에 대한 사색이 범람했다. 사색의 종류도 꽤나 세분화되어 '자살를 거꾸로 읽으면 살자' 따위의 촌스러운 경구부터 시작해서, '한국인의 죽음론'에 이르기까지 ?

  2. Subject: [트랙백]죽을 줄도 모르는 2

    Tracked from 금성에서 온 사람의 얼음집 2005/03/17 14:34  삭제

    "인간이 살아있다는 건 인간으로서 위엄을 유지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를테면, 잠자는 시간만 빼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만 궁리하는 인간은 전혀 살아있는 게 아니다. 남보다 잘 먹고 잘 ?

  3. Subject: 윤리 선생님이 되어버린 김규항?

    Tracked from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2005/03/20 20:21  삭제

    고등학교때 김규항의 글을 읽은 후부터 난 그의 팬이 되어버렸다. 그의 글에 대한 매력, 내지는 마력은 이미 여러서람들이 밝혀 놓았듯이 솔직함과 위선에 대한 강한 혐오. 그리고 현실에 대한

  4. Subject: 자살

    Tracked from decadence in the rye 2005/03/23 03:33  삭제

    자살에 대한 동의하기 어려운 글 happyalo님의 블로그에서 트랙백. 김규항님 블로그와 반달님의 블로그에 가서 해당되는 글을 읽어보았는데, happyalo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느끼고 계신 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