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5/29 17:05
어느 대학 대동제 첫머리에 열린 "내 나이 스물"이라는 제목의 5.18 기념 강연회에 갔다. 광주항쟁에 대해 달리 새로운 걸 학습하려는 건 아니었다. (내 세대가 대개 그러하듯 나는 대학 시절 무던히도 광주의 실상을 알기 위해 노력했고 덕분에 5월 18일에서 5월 27일 새벽까지 광주의 상황을 속속들이 꿸 수 있다.) 나는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문제, 그러나 20년이 지나 정서적으로 앙상해진 문제에 살을 입힐 필요를 느꼈던 것 같고 만사를 제쳐두고 그곳에 갔다. 그런 행동이 내 알량한 사회의식을 면피하려는 연례행사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2만 명이 다니는 대학에서 열린 5.18 기념 강연회엔 채 열 명이 못 되는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연사는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싸우다 5월 27일 새벽 전남 도청에서 계엄군에 생포된, 당시 스물이었고 올해 마흔인 정종선씨였다. 그는 아들이 거리로 나갈까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의 눈길을 피해 밤중에 몰래 담을 넘었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나 그와 같은 선택을 하진 않을 거라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말했다. "내겐 카빈 소총과 수류탄이 있었다. 계엄군이 손들고 나오라 소리치는 순간 나는 죽어야 한다고, 그것만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곁에서 울며 떨고 있는 여고생이 눈에 밟혀 결국 죽지 못했지만, 나는 그후 그 순간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나는 지난 20여 년을 전쟁처럼 살아 왔다."

지난 해 5.18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의 열기에 묻히는가 했는데, 올해는 20주년이라선지 여기저기 5.18 기념 열기가 두드러진다. 전국 각지에서 어린 학생들이 단체로 망월동을 찾는다는 신문 기사는 그날 아침을 청량하게 했다. 그런가 하면 엊그제 지나친 영등포 어느 대로변엔 "5.18 광주 순례단 모집, 한나라당 OO 지구당"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런 걸 '개나 걸이나'라고 했던가. 다큐멘터리 영화 <민들레>에는 유가협 어머니들이 한나라당 당사 화장실에서 "이놈들 화장실 좋은 것 좀 봐. 이놈들이 우리 자식 죽인 놈들인데..."하고 독백하는 장면이 있다. 내 생각에 그 당을 그 독백만큼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 당에 아무리 젊은 피와 붉은 피(다른 말로, 빌어먹을 자식들과 벼락 맞을 자식들)가 수혈된다 해도 말이다.

백번을 양보하여 그 당이 이승만의 자유당과 박정희의 공화당을 계승한 곳이라는 사실은 참아 넘긴다 하자. 그러나 그 당이 도살자 전두환의 민정당을 고스란히 계승한 곳이라는 사실까지 참아 넘길 수 있는가. 사회적 사건에 대한 관용은 사회적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상식을 들추지 않더라도, 그런 권리는 20년 전 광주의 당사자에게나 있다. 그런 권리가 우리에게 없을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도살자의 숨겨진 공범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광주가 다른 지역의 한국인들로부터 얼마나 철저하게 고립되고 버려졌던가. 당시는 당시의 엄혹한 상황을 핑계로 삼는다 해도 우리가 그후 일관되게 도살자의 충실한 공범 노릇을 해온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변명할 수 있는가. 도살자가 제 손에 묻은 피를 씻고 새로운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칠 때 압도적인 찬성을 보내고 도살자를 대통령으로 뽑고 도살자의 '정의사회 구현'을 지지하고, 그도 부족해 도살자의 충실한 동료를 다시 대통령으로 뽑아준 우리의 죄를 말이다.

폭도라 하면 폭도인가 했고 이제 항쟁이라 하니 항쟁인가 할뿐인 우리가 굳이 광주를 추억하고 광주 20주년을 기념할 이유는 무엇인가. 광주 20주년을 기념하는 우리는 그 20년 동안 광주에 지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어떤 절차를 거쳤던가. 2만 명의 학생이 다니는 대학에서 열린 5.18 강연회에 모인 열 명이 못 되는 학생과 도살자의 당이 영등포 대로변에 내 건 5.18 광주순례단 모집 플래카드의 머나먼 거리 속에서 대체 우리는 우리의 어떤 인간적 분별력을 추출할 수 있는가. 20년이 아니라 200년이 지난다 해도, 참회가 없는 우리는 여전히 도살자의 충실한 공범일 뿐이다. | 씨네21 2000년_5월
2000/05/29 17:05 2000/05/2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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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광주 단상 [2000.05.29]

    Tracked from 문원종의 블로그 2004/08/24 04:01  삭제

    광주 단상 [2000.05.29]<@NHN@LINEBREAKER@NHN@><H3 class=title>광주 단상</H3> <DIV id=underline> 어느 대학 대동

  2. Subject: 광주 단상 - 규항 닷넷에서 펌.

    Tracked from 호빵맨의 짧은 생각들 2004/12/22 02:53  삭제

    어느 대학 대동제 첫머리에 열린 "내 나이 스물"이라는 제목의 5.18 기념 강연회에 갔다. 광주항쟁에 대해 달리 새로운 걸 학습하려는 건 아니었다. (내 세대가 대개 그러하듯 나는 대학 시절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