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3/14 16:44
밤늦게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다. 내가 전에 한 얘기가 생각나서 그런다고 하기에 무슨 얘기냐 물으니 ‘자서전’ 이란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혹시 무안해 하실까봐 가만 들어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당신이 겪은 일들을 죽 한번 적어보고 싶단다. “그렇게 적어놓으면 니가 거기에 살을 붙이고 해서 쓸모 있게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오래 전에 내가 그런 권유를 했던 것도 같다. 그때 아버지는 “싱거운 소리 마라” 쯤의 반응을 보였을 것인데 마음에 새겨두셨던 모양이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버지 살아오신 게 우리나라 역사와 결부된 게 많으니까 자료적인 가치가 있고.” 아버지는 1935년에 태어나 일제, 좌우대립, 6.25전쟁을 비롯한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다 겪으며 살아왔다. 물론 그 연배의 분들이 다 그걸 겪었지만 ‘일본에서 태어난 전라도 사람’인 아버지는 그 결이 좀 다르다. 그는 오래 전 풋내기 대학생이던 내가 읽으라고 갖다 드린 태백산맥 열권을 “다 실제로 본 얘기라 시시하다”며 그대로 돌려준 일도 있다.(실은 나도 그 책이 ‘이상하게’ 별로라서 두 권도 채 못 읽고 아버지에게 넘긴 거였다. 다들 조정래가 위대하다는데 왜 나는 별로일까.) 내가 좌익에 대해 단 한 번도 부정적이지 않았던 것도 아버지(와 어머니) 덕이다. 오래 전에 뿌리깊은나무에서 민중자서전이라는 걸 냈었다. 물론 거기 나오는 ‘민중’들은 드문 재주를 가졌다든가 하는 이들이었지만 적어도 그 책은 자서전은 가오다시가 특별한 사람들이나 내는 거라는 편견을 거슬렀다. 아버지는 특별한 분도 아니고 드문 재주를 가진 분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 온 칠십년에 해당하는 한국 역사, 그 특별한 역사를 투영하기엔 적절한 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서전이 그저 개인적인 의미만 가지면 또 어떤가? 그는 바로 내 아버지인 걸. 그의 인생의 절반은 내 인생이기도 하다.
2005/03/14 16:44 2005/03/14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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