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5/17 17:03
386이라는 경박한 조어(실재한 한 세대를 그런 빈곤한 상상력으로 요약했다는 점에서, 그런 빈곤한 상상력의 조어가 멀쩡한 시사어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기말엔 세상의 미감이 동반 폭락하는 것일까)로 지칭되는, 80년대의 청년들은 80년 광주에 근거했다. 그들이 세상은 고쳐나가기보다는 갈아엎어야 한다는 합의에 이른 건 80년 광주에서 미국의 역할을 알아차리고부터다. 문부식(오늘 홍대 근처에서 <당대비평>을 만들고 있는)과 그의 동료들이 부산 미문화원에 불을 지른 일은 그 합의의 시작이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내세운 군사 파시즘과 20여 년을 싸워오면서도 미국을 거스르지 않던 한국 청년들의 낭만은 급격하게 혁명의 긴장으로 전이했다.

82학번인 나는 그들의 한 성원이다. 해방 공간이 (박정희 같은 인간마저 잠시 사회주의자였을 만치) 한 군데라도 똘똘한 청년은 모조리 빨갱이로 만든 시대였듯, 80년대는 한 군데라도 진지한 청년은 모조리 빨갱이로 만든 시대였다. 미 제국주의를 만악의 근원으로 보는 종속이론에서 출발한 우리는 마오나 그람시를 거쳐 연어가 강물을 오르듯 사회주의 운동사를 거슬러 올랐다. 80년대 중반이 지날 무렵, 우리 가운데 한 무리는 레닌에 안착했고 다른 한 무리는 김일성에 안착했다. 한 무리는 한국의 80년대를 19세기말의 러시아와 등치 하여 계급 해방을 이루려 했고 다른 한 무리는 남한의 북한화를 통해 조국 해방을 이루려 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우리의 선택은 명백하게 좌편향이었다. 우리의 선택이 가진 이념적 현실적 합리성을 떠나 그 시기가 지난 후 우리가 보인 삶의 궤적을 반추한다면, 우리가 앞으로 보일 삶의 궤적을 추정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90년대 우편향의 바람에 편승해 (우리가 80년대에 내보인 치열함에 비하면) 서글플 만치 졸렬하게 우리의 정신을 청산했다.

80년대를 거대한 가상현실게임으로 만든 그 졸렬한 청산은 대개의 우리 안에서 오늘까지 이어지지만, 그래도 우리의 80년대를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시려온다. 80년대는 연단에 서서 20년 후 수많은 동료들의 정신을 박제로 만들어 금배지와 바꿀 계획을 짜던 놈들이나, 조직생활에 적응 못 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데모만은 개근하려 애를 쓰던 나처럼 하찮은 인간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청년들이 두 번 다시 사적 안락을 찾기 힘들 삶의 지점을 찾아, 죽고 다치고 스러져갔다. 가슴이 시려온다.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그 순수와 정열의 순간을 생각하면 말이다.

이제 마흔에 임박한, 80년대의 한 하찮은 성원인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우리의 선택은 대개의 우리가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던 것 같다.

오늘 나는 네 이념이 뭐냐는 질문에 “초보 좌파”라 답하곤 한다. 초보라 한정하는 건 내가 좌파가 뭔가를 제대로 안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이유보다는, 아직은 내가 제대로 된 좌파로 살아갈 가망성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좌파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 나는 (글이나 말로가 아니라)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좌파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인가. 자신 없어 하는 내게, 한 어린 후배가 붙여준 새로운 별명이 위안을 준다. B급 좌파. 그래, B급이라도 좌파로 살 수 있다면. | 씨네21 2000년_5월
2000/05/17 17:03 2000/05/17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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