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5/02 17:02
1968년, 재일교포 2세 서준식은 '조선놈이 되기 위해' 한국에 유학한다. 그러나 60년대 한국 민중들의 비참한 현실 앞에서 그는 '세상을 묶어두는' 법학을 버리고 '세상을 교정하는' 사회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맑스레닌주의 고전들을 섭렵하던 그를 구체적인 현실 속으로 몰아넣은 건 그의 형 서승과 순진한 호기심으로 북한을 다녀온 후였다. 박정희 정권은 형제의 방북을 일치감치 파악했지만 뜸을 들였다 대통령 선거에 맞춰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다. 서준식은 7년의 형기를 마치고도 전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0년의 보호감호 처분을 받는다. 도합 17년 동안의 옥살이 동안 서준식은 인간 해방의 문제가 그가 스무 살 무렵 받아들인 맑스주의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를 발견하지만 끝내 전향하지 않았다. 사람의 생각은 자유롭고 그 어떤 권력도 그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는 신념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87년 비전향 좌익수(간첩)로서는 처음으로 만기 출소한 그는 도시빈민들 속에서 소박하게 살려 했지만 그를 찾아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피하지 못한다. 운동권에서조차 반기지 않던 조작 간첩의 가족들이었다. 얼마 후 그는 운명적인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만나고, 글을 쓰고 싶다는 또 하나의 소망을 접은 채 인권운동사랑방을 꾸리고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오늘 그는 여전히 국가권력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잡아들일 수 있는 보호관찰 상태 속에 살아가고 있다.

내가 서준식을 처음 본 건 지난 해 여름 '하루감옥체험'에서였다. 연단에 앉은 이들 가운데 유독 그만 굳은 표정으로 정좌하고 있었고 나는 듣던 대로 저 양반 되게 고집 세게 생겼군, 했다. 몇 달이 지나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나고 얼마간 친해지고서야 나는 그가 강고한 맑스주의자라기보다 천진한 소년에 가까움을 알 수 있었다. 온갖 색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그의 일정표와 진보적 인권운동의 틀을 잡으려 일분일초를 쪼개는 그의 초조함은 아버지의 직업을 인권운동가라 말하는 초등학생 두 딸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그의 아기자기함과 소박한 긴장을 이룬다. 고집불통이라는 평가는 그의 비타협성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아마도 그를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에겐 그렇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한없이 가치 기준이 낮아진 세상은 정당한 가치 기준을 지키려는 한 인간을 비난할 필요가 있는 것이리라.

내가 서준식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가 내가 만난 어떤 인간보다 존중할 만한 사회의식과 그에 합치하는 실천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지만, 졸렬하나마 글로 세상에 발언하는 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공정성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90년대 중반 이후 시민운동이 갖는 나름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그런 운동의 각광 속에서 오늘의 구조를 넘어서려는 서준식의 운동이 갖는 가치가 폄하되는 현실을 반대한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시민운동에 대해 그 가치에 값하는 충분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면 나는 서준식의 운동에 대해 그 가치에 값하는 충분한 지지를 보내고 싶다.

인권운동가 서준식은 하늘이 준 보편적 인권을 믿지 않는다.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한 계급에 주어진 권리는 다른 계급에 억압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인권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정당한 권리이며 그의 인권운동은 더 이상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당연한 노력이다. 내 생각에 서준식이 바라는 세상이 그의 당대에 도래할 가능성은 많지 않지만, 그런 세상이 언제 도래할지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서준식은 단지 지금까지 그가 그렇게 살아왔듯 올바른 세상을 위해 올곧게 전진할 뿐이다. 올바른 것만이 영원하며 그에게 다른 선택은 없어 보인다. 나는 서준식을 지지한다. | 씨네21 2000년_5월
2000/05/02 17:02 2000/05/0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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