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1/11 00:13
연대를 표기하는 방법은 한 사회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북한은 김일성이 태어난 해를 기원으로 하며 남한에서도 민족애가 강한 사람들은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새운 해를 기원으로 하는 ‘단기’를 쓴다. 올해는 주체 94년이자 단기 4338년이다. 그러나 오늘 일반적으로 쓰는 연대표기 방법은 서력기원, 즉 ‘서기’다. 서기는 예수가 태어난 해를 기원으로 한다. 재미있는 건 예수가 태어난 해는 서기 1년이 아니라 기원전 4년 경이라는 것이다. 525년 교황의 명을 받아 서기를 계산해낸 수도사(디오니시우스엑시구스라는 긴 이름을 가진)의 실수로 그렇게 되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인 성과를 얻기 시작한 건 현대에 들어와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별 진척이 없었던 첫번째 이유는 기독교를 국제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바울이 역사적 예수보다는 그리스도 예수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죽음을 당할 만큼 험악했던 당시의 사회적 정황에서 정치범으로 죽은 예수를 ‘탈현실화’하는 그의 방식은 이해할 만한 것이지만 그 덕에 기독교(카톨릭이든 개신교든)는 역사적 예수를 소홀히 하는 전통을 갖게 되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로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가 신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좋든 싫든 이 글을 읽는 상당수의 동지들이 외울 수 있을 ‘사도신경’의 전문(개신교판)이다. 여기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해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정작 예수의 삶에 대해선 아무 언급이 없다. 예수는 시종일관 머리 뒤편에 둥그런 불이 켜진 신인 것이다.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찍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대식구를 건사해야 했던 평범한 팔레스타인 청년의 30여 년은 흔적조차 없다.

만일 바울이 좀 더 역사적 예수에 집중했다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가 충분했을까? 꼭 그랬을 것 같진 않다. 예수는 2천년 전, 우리로 말하면 바야흐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생겨나던 무렵의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이나 행적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사고방식은 그런 고대사회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것이다. 예수의 사상과 행적엔 사회주의, 페미니즘, 아동인권, 생태주의 같은 인류가 이룬 가장 최근의 정신적 진척들이 이미 가장 조화로운 형태로 들어 있다. 그를 직접 보았다 해도 그런 개념의 씨앗조차 없던 사람들이 그를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예수와 같은 경우는 역사 속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을 통틀어 봐도 찾기 어렵다. 사람이란 자기가 속한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을 근본적으로 거스를 수 없다. 어느 한 부분에 매우 급진적인 사람이라 해도 다른 부분에서는 여전히 지배적인 정신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사상과 행적의 면에서 예수와 비교해서 말할 만한 수운 최제우가 1824년생이라는 걸 생각한다면(수운은 예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예수는 참 놀라운 사람이다. 이제 하나씩 짚어보기로 하자. (노동자의힘 기관지, 계속)
2005/01/11 00:13 2005/01/11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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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역사적 예수

    Tracked from 宇宙의 털끝에 앉은 작은 먼지 2005/01/11 10:54  삭제

    김규항씨의 글 [예수이야기]를 흥미롭게 읽고 있다. 그가 그 세번 째 글에서 사도 바울에 관하여 말하였다. 사도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 관하여 ?

  2. Subject: 역사적 예수와 성령

    Tracked from CHANGMOO.NET 2005/01/13 22:09  삭제

    김규항의 예수이야기 3 에 대한 트랙백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강조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너무 지나치게 소홀히 다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예수를 무시한 결과,

  3. Subject: [펌] 예수이야기 3

    Tracked from Roaring Silence 2005/01/21 16:47  삭제

    관심있게 읽고 있는 글이다. 김규항, 그의 글은 참 쉽다. -- 예수이야기 3 연대를 표기하는 방법은 한 사회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북한은 김일성이 태어난 해를 기원으로 하며 남?

  4. Subject: 15. 김규항 그의 글을 읽으면...

    Tracked from 푸르미 세상 2005/01/26 20:30  삭제

    김규항. 그의 글을 읽으면 잠시나마 생각에 젖는다. 그리고 너무도 부럽다. 그토록 부드럽게 이야기를 꺼내 자신만의 방법으로 글을 이어가는 '글의 유기적인 성격'을 너무도 잘 만들어낸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