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22 13:16
읍사무소에 뭘 떼러 가서 운전면허증을 내밀면 거기 앉은 이가 꼭 한마디씩 한다. 내가 아직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았다는 걸 두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말투는 상냥하지만 내용은 은근한 훈계다. 그러면 그저 좀 더 노골적인 훈계를 늘어놓지 않는 것이나 다행으로 여기며 잠자코 있다. 읍사무소의 말단 공무원과 지문날인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게 하찮은 일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 함부로 간섭하는 사람’에 대한 측은함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 주변엔 그런 사람들이 참 많다. 그게 한국인의 특징이라고도 하지만 글쎄 다른 사람의 삶에 함부로 간섭하는 피를 타고난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파시즘 치하에서 오래 살다보니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다. 파시즘이란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다. 그러나 개인은 우리가 흔히 파시즘의 요소들이라 여기는 감시, 폭력, 고문, 계엄령 따위의 억압적인 방법만으로는 없어지지 않는다. 수면 아래로 숨을 뿐이다. 개인을 없애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개인끼리 서로를 없애게 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들이 다른 개인의 삶에 함부로 간섭하도록 길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파시즘의 집행자들의 숙제이며 그것만 되면 사천만이 아니라 사십억도 줄에 달린 인형처럼 쉽게 조종할 수 있다. 끔찍한 건 그렇게 길들여진 습성이 파시즘의 집행자들이 물러간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아 작동한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촛불행진을 벌이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지문날인이라는 능욕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늘 공동체적 이상을 좇는다. 사회주의적인, 혹은 생태적인, 혹은 또 다른 고귀한 지향을 가진. 공동체적 이상은 인간이 갖는 가장 인간적인 전망이며 세상이 진보한다는 건 결국 공동체적 세상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공동체적 이상을 좇기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게 있다. 진정한 개인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개인이 되지 않고는 우리에게 공동체는 없다. 이런저런 집단만이 있을 뿐.
2004/12/22 13:16 2004/12/2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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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테스트

    Tracked from 旅行 2004/12/23 18:26  삭제

    김규항의 블로그 작가 지난 금요일 돌베개출판사와 책들을 계약했다. 야간비행이 아닌 다른 곳에서 책을 내기로는 했지만 ‘나 이제 다른 출판사에서도 책 내요!’라고 광고를 할 수도 없고 ?

  2. Subject: 나를 입증하는 방법

    Tracked from Sleepiness in Chapel Hill 2004/12/24 13:56  삭제

    <FONT face=굴림 color=#177fcd>작년&nbsp;12월 초, 저녁 8시 45분, 갑자기 Alica가 영화 보러 가자고 했다. 9시에 시작하는 영화, Elf를

  3. Subject: [Trackback] 개인 - 어떤 소시민의 변명

    Tracked from nobody&#39;s nowhere place 2004/12/26 15:09  삭제

    고등학교 시절, 때마침, 라디오 프로에서 들려주는 사연 중에, "열 손가락 지문을 찍으며 전 드디어 성인이 된 것을 느꼈습니다"를 들으며 고개 끄덕이고 동사무소에 내 손가락에 인주를 묻히러

  4. Subject: 김규항 - B급 좌파

    Tracked from 발전소 2004/12/29 19:13  삭제

    인생에서 일종의 전환기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책이다. 사실 내 인생이 크게 바뀐 것도 없지만 못보던 부분을 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나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룬 남들은 여전히 인?

  5. Subject: [개인] 규항닷넷에서 펌.

    Tracked from 호빵맨의 짧은 생각들 2005/01/03 11:21  삭제

    파시즘이란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다. 그러나 개인은 우리가 흔히 파시즘의 요소들이라 여기는 감시, 폭력, 고문, 계엄령 따위의 억압적인 방법만으로는 없어지지 않는다. 수면 아래로 숨?

  6. Subject: 시험중

    Tracked from 2005/01/05 22:27  삭제

    블로거가 된지 20여일이 돼간다. 오늘은 처음으로 트랙백을 하는 날. 내 첫 트랙백 대상으론 당연 김규항의 글이다. 부끄러워서 나름 오래된 글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