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11 08:14
역사 속에서 민중의 선택을 엄격하게 말하지 않는 건 자신을 진보주의자라고 믿는 엘리트들의 오랜 습성이다. 민중의 힘이나 민중의 위대한 선택은 강조되지만 그런 선택의 시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점에서 존재하는 민중의 무지나 비굴은 언제나 생략된다. 이를테면, 박정희 이후 수십 년 동안 진행되어 온 군사파시즘에 대한 민중의 선택은 그저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민중들’이라 기술되곤 한다. 물론 그건 사실과 다르다. 과연 그 시절 신음하던 민중이 몇이나 있었던가? 신음하면 죽거나 다치던 시절이었다. 대개의 민중들은 제 식구나 챙기며, 파시즘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 말하며 살았을 뿐이다. 민중들의 그런 무지나 비굴은 위대한 선택의 순간과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한 가지 진실만을 부각하려는 진보적 엘리트들에게 민중은 실제 현실 속의 민중이라기보다는 제 관념 속의 ‘민중상’에 가깝다.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두고 “공포가 혐오를 이겼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결국 비슷한 이야기다. ‘부시는 나쁜 놈이지만 미국 민중들은 죄 없는 피해자’라는 식의 이야기는 미국 민중의 무지나 비굴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보적 엘리트들의 욕구에 봉사하지만 진실은 아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의 가장 중요한 진실은 ‘미국 민중들은 부시를 대통령으로 뽑았다.’는 것이다. 투표를 한 건 미국 민중들인데 투표의 결과엔 미국 민중들의 책임을 묻지 않는 건 역시 관념 속의 민중상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미국 민중들이 부시라는 나쁜 놈에 사로잡힌 것인지, 미국 민중들의 저급한 사회의식과 국가주의를 부시가 반영할 뿐인지, 혹은 그 중간 어디인지를 따지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다. 오늘 미국 민중들의 사회의식과 국가주의의 상당 부분이 오랜 여론 조작과 이데올로기 공작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미국 민중들을 두둔하는 것 역시 온당하지만은 않다. 그런 태도는 실은 미국 민중들을 바보 취급하는(자신의 의식에 대해 어떤 주체적 능력도 없이 여론 조작과 이데올로기 공작에 조정당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것이며, 오늘 미국 민중들이 공포에 빠지게 된 원인이라 말하는 9.11 사건과 같은 공포를 평생 겪으면서도 복수가 아니라 평화를 갈망하는, 복수의 희망조차 포기한 수많은 제3세계 민중들에 대한 모욕이다. 최소한의 인간미를 가진 어떤 사람도 9.11 사건 이후 미국 민중들의 공포를 무시하지 않겠지만 그 공포가 다른 모든 공포들을 무시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공포인 건 아니다. 미국 민중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을 진심으로 존중한다면 분명히 말해주는 게 좋다. “너희들의 저급한 사회의식과 국가주의가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가고 있다.”
2004/11/11 08:14 2004/11/11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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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asdfasdg

    Tracked from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2004/11/11 17:59  삭제

  2. Subject: 공포는 무섭다

    Tracked from ssarii 2004/11/12 07:04  삭제

    공포가 혐오를 이겼다? 역사 속에서 민중의 선택을 엄격하게 말하지 않는 건 자신을 진보주의자라고 믿는 엘리트들의 오랜 습성이다. 민중의 힘이나 민중의 위대한 선택은 강조되지만 그런 선?

  3. Subject: 이 곳은 우리의 세상이다

    Tracked from ☎ life is what i make 2004/11/12 23:11  삭제

    trackbacked from http://gyuhang.net/mt/mt-tb.cgi/440 공포가 혐오를 이겼다? 역사 속에서 민중의 선택을 엄격하게 말하지 않는 건 자신을 진보주의자라고 믿는 엘리트들의 오랜 습성이다. 민중의 힘이나 ?

  4. Subject: 규항닷넷에서 펌.

    Tracked from 호빵맨의 짧은 생각들 2004/11/13 04:04  삭제

    공포가 혐오를 이겼다? 역사 속에서 민중의 선택을 엄격하게 말하지 않는 건 자신을 진보주의자라고 믿는 엘리트들의 오랜 습성이다. 민중의 힘이나 민중의 위대한 선택은 강조되지만 그런 선

  5. Subject: 민중은 피해자이며 가해자이다.

    Tracked from true&monster 2004/11/15 00:36  삭제

    공포가 혐오를 이겼다? 역사 속에서 민중의 선택을 엄격하게 말하지 않는 건 자신을 진보주의자라고 믿는 엘리트들의 오랜 습성이다. 민중의 힘이나 민중의 위대한 선택은 강조되...

  6. Subject: 쏘리에브리바디닷컴(www.sorryeverybody.com)

    Tracked from 단상(斷想)들 2004/11/16 21:52  삭제

    이런 사이트가 있다, 아니 있었다. 지금은 홈페이지가 작동을 멈췄다. 여기에는 부시의 재선을 세계인들에게 미안해 하는 미국 시민들의 이야기와 사진이 실려 있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선배?

  7. Subject: 민중의 순수성에 대한 의문

    Tracked from phlip의 홈페이지 2004/11/23 17:07  삭제

    한국에서도 김규항님의 이 문제제기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국보법에 대해 지식인(지식노동자)보다 민중이라 불리는(나는 이제 이 말을 쓰기 싫다) 육체노동자계층이 더 반대하는 현상은 이른?

  8. Subject: 좌파에게 보내는 고언(김규항의 글에 덧붙여)

    Tracked from phlip의 홈페이지 2004/11/23 17:11  삭제

    한국에서도 김규항님의 이 문제제기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국보법에 대해 지식인(지식노동자)보다 민중이라 불리는(나는 이제 이 말을 쓰기 싫다) 육체노동자계층이 더 반대하는 현상은 이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