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10/05 16:47
연대 총학생회에서 마련한 '저자와의 대화'에 불려 갔다. 학생들끼리 만나고 싶은 저자를 투표했고 진중권과 내가 결과라 했다. 매일 붙어 다니는 사이인 데다 <아웃사이더>라는 잡지도 함께 준비하고 있는 둘을 불렀다는 우연도 희한했지만 아직 저자가 아닌(한 권의 책도 내지 않은) 내가 거기 낀 일은 더욱 희한했다. 얼마간의 민망함과 비슷한 양의 흐뭇함을 안고 나는 거기에 갔고 다행스럽게도 '대화'는 유쾌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사는 게 하도 팍팍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이른바 영화전문서 출판을 시작한 이래 맺어 온 염치와 우애가 없는 인간관계를 모두 접으려 두 시간에 한번씩 버스가 들어오는 파주의 어느 마을에 들어간 지 6개월. 인간에 대한 절망감과 남들 한달 월급만큼의 한달 이자를 온갖 노동으로 때워야 하는 삶의 팍팍함을 위무할 길을 찾던 나는 불현듯 글쓰기를 떠올렸다. 글쓰기는 내가 이미 접은 과거의 인간관계를 통하지 않고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씨네21> 편집장과 알지 못했다면 그나마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글쓰기 이력이 전무한 건달에게 글쓰기를 하도록 배려한 세상에 감사했다. 다른 이보다 족히 십 년은 늦게 글쓰기를 시작한 내겐 그 십 년 동안 쌓였어야 할 나름의 '문장'도 이런저런 '지성'도 없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생각을 가감 없이 옮겨 적는 '솔직한' 글쓰기뿐이었고, 언젠가는 그 솔직함이 정직이 되고 그것이 다시 진실이 되길 기대했다.

나는 글쓰기를 용접공이 용접을 하듯 한 사람이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한 가지 노동이라 여겼다. 용접공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건너다닐 다리를 용접하는 것처럼 지식인의 글쓰기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사용할 정신의 다리를 용접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일년 반. 어느새 글쓰기는 세상과 나의 관계에서 나를 대표하는 일이 되었고 내가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는 방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나는 이제 처음엔 어색하기만 했던 '필자'니 '지식인'이니 하는 호칭으로 불리는 일에 꽤 익숙해졌고, 심지어 내게 남은 약간의 어색함을 "나는 진보지식인입니다" 하는 너스레로 뒤집어 사람을 웃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 너스레가 완전한 농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분노와 거부감을 안겨줄 만한 말이지만) 나는 오늘 이 나라의 글쓰기가 진보가 아닐 도리가 없다 생각한다. 알다시피 이 나라의 모든 정신적 다리는 무너진 지 오래다. 이 나라에서 사회 정의와 개인의 양심은 강물 속에 흩어진 잔해로만 남아 있다. 이런 현실을 분명히 하고 그 다리를 성실하게 다시 지으려는 당연한 태도가 바로 진보다. 보수라면 다리가 무너진 현실을 인정은 하되 그 다리를 적당히 고쳐 사용하자 할 것이고 극우라면 아예 다리가 무너지지 않았다 생떼를 쓸 것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보수는 오늘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고 극우는 오늘의 이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안 쓴다면 모를까 이 나라의 글쓰기가 진보가 아닐 도리가 있는가.

그나저나, 밑도 끝도 없이 삶의 팍팍함을 위무하겠다는 무식한 생각으로 글쓰기에 뛰어든 나 같은 건달도 아는 그런 소박한 이치를 도저한 지식과 장구한 글쓰기 이력을 가지고도 깨치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된 사정일까. 그들이 하나같이 아둔한 걸까, 그저 나 혼자 싸가지가 없는 걸까.

추신 : '저자와의 대화'에서 만난 '그들'(오늘의 대학생들)에 대한 소감. 짐작대로 '그들'은 '우리'(80년대의 대학생들)보다 대체로 탈정치적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정치성의 숫자가 아니다. 알다시피 세상은 한순간에 바뀌는 게 아니며 문제는 그 정치성이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되는가다. '우리'의 부끄러운 이력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그래서 적지만 오래갈 듯한 정치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일단 나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고 싶다. | 씨네21 1999년_10월
1999/10/05 16:47 1999/10/0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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