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3 14:44
TV의 변함없는 정치적 소임은 세계의 일부를 말하면서 전부를 말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그 꽃은 ‘TV토론’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구도는 지배계급의 ‘보수 분파 V 자유주의 분파’의 대립이었다. 박근혜 탄핵 이후 사회문화 부문에서 보수 분파가 괴멸하다시피 함으로써, 자유주의 분파끼리 대립이라는 희한한 구도가 나타나고 있다.

아직 한국 TV의 컨텍스트(부르디외 선생이 말한), 즉 이념적 상한선은 자유주의이므로 ‘자유주의 V 좌파’ 구도는 기대하기 어렵다. TV 토론에서 계급이나 사회주의 이야기를 하는 건 방송사고에 해당한다. 그러나 구도가 어떻든, TV의 정치적 소임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게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하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아무리 진전해도 ‘혁명은 TV에 방송되지 않는다.’

행여 이 이야기를 상투적인 이데올로기론으로, TV가 시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허위의식을 만들어낸다는 식의 이야기로 오해하진 않길 바란다. 사태의 진실은 TV가 시민을 잡아먹는 게 아니라, 물신화한 시민이 TV를 양식으로 한다는 데 있다. TV의 정치적 소임을 실제로 구현해주는 건, ‘정치의 주체’가 되길 회피하기 위해 ‘정치극장의 관객’이 되는, TV 토론 시청과 허세에 찬 논평에 열중하는 시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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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TV에 방송되지 않는다 The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는 길 스콧 헤론이 1970년 발표한, 랩과 힙합의 효시가 된 곡 제목이다. 내가 참여한, 2017년 SFX 서울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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