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13 22:05
1928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생을 상대로 ‘우리 손주 세대를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특강을 한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지 얼마 안 되었고, 배우고 똑똑한 젊은이는 다 빨갱이라는 말이 도는 시기였다. 케인즈는 ‘어리석은 열정’에 빠질 위험에 처한 젊은이들에게 자본주의의 우월함을 힘주어 설파한다. ‘자본주의가 현재 상태로 부의 축적을 지속하고 생산력이 발전하면 대략 한 세기 후면 모든 사람이 주 15시간만 일하고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케인즈가 예언한 시점에 이른 지금 그 절반은 이미 이루어졌다. 현재 자본주의 생산력은 대개의 사람이 적정한 삶을 유지하는 데 주 10시간 노동이면 가능한 수준이다. 그러나 주 15시간 노동은 여전히 꿈같은 이야기다. 2016년 기준으로 OECD 35개국 평균 노동 시간은 주 34시간이고 한국은 주 41시간(물론 실제로는 더 많다)이다. 이상한 일이다. 케인스의 말마따나 생산력이 발전하면 당연히 그만큼 노동 시간도 줄어야 하지 않는가.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윤 추구를 위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윤의 근원은 잉여노동에 있다. 자본은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노동이 주 15시간인가 10시간인가엔 관심이 없다. 일자리는 줄여도 노동 시간은 줄이려 들지 않는다. 케인스는 순진했던 셈이다. 반공주의자인 그는 ‘유효 수요’는 생각했지만  맑스의 성과로 여겨지는 ‘가치론’에 대해선 무지했다.

18세기 개량된 증기 기관으로 산업혁명이 본격화할 때도 사람들은 같은 착각을 했다. 인간 신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생산력을 가진 기계가 인간의 노고를 덜게 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더 길고 가혹한 강요받았다. 당시 영국 노동자의 평균 수면 시간은 3시간, 평균 수명은 30세였다. 노동자들은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인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기계나 기술 발전이 아니라 기계와 기술 발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다.

"기계 그 자체는 노동시간을 단측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시간을 연장시키며, 기계 그 자체는 노동을 경감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강도롤 높이며, 기계 그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인간을 자연력의 노에로 만들며, 기계 그 자체는 생산자의 부를 증대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생산자를 빈민으로 만든다."(자본론 1권)

20세기 중반 미래 사회를 그린 만화들은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인간은 편안하게 저마다의 시간을 즐기는 모습을 그리곤 했다. SF작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미래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남는 시간’일 거라 단언했다. 자본주의의 대표적 거짓말 중 하나는 과학 기술 발전이 ‘인간의 더 편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 기술 발전은 과학자나 기술자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본의 이윤 추구를 위해 이루어진다.

오늘 인공 지능이나 로봇 같은 기술 혁신은 ‘4차산업혁명’ 따위 수사와 함께 ‘보편적 문명 변화’로만 여겨진다. 인공 지능이나 로봇이 노동 시간을 줄여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게 아니라 일자리만 줄게 하고 불안정한 삶을 강요하는, 앞뒤 안 맞는 상황에 대한 질문은 찾아볼 수 없다. ‘인공 지능 시대의 인간’ ‘인공 지능 시대의 노동’ 식의 논의가 있을 뿐, ‘인공 지능 시대’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찾아볼 수 없다. 자본의 논리와 긴장을 이루어야 할 인문학이 ‘CEO의 기술’ 노릇을 하는 마당이니 오히려 당연한 일일까.

그런 지적 파탄의 상황에서 그 상황과 온전히 마주서는 예술적 시도를 만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권병준 개인전 <클럽 골든 플라워>은 진지한 예술가의 직관이 세계를 둘러싼 기만과 허위의 체제와 지적 게으름을 한순간에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두운 전시장은 인간의 여러 행위를 모방하는 12개의 로봇으로 채워져 있다. 로봇들은 제 빛으로 서로를 비춰가며 온종일 각자의 행위를 수행한다. 어느 순간 음악이 시작되고 로봇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군무를 시작할 무렵, 당신은 삶에 예술이 개입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19/01/13 22:05 2019/01/13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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