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16 13:43
“모든 사람이 원하는 분야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여,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일을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평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이른바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서술이다.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고 사회가 최선의 형태로 조직되면 인간은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에겐 공상적인, 아니 오늘 현실을 생각한다면 쓸모없는 망상에 불과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케인즈는 어떤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인간의 지옥으로 보고 그 붕괴를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지만 케인즈는 자본주의를 최선의 체제라 본 사람이다. 다만 자본주의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보이지 않는 손’에만 맡기는 게 아니라 적절한 수정과 관리가 필요하다고 봤다. 알다시피 케인즈의 생각은 20세기의 절반 이상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틀이었다.

케인즈는 과학기술 발전과 생산력 혁신으로 다음 세기 초쯤(지금이다) 되면 주 15시간 노동을 하며 살게 될 거라고 낙관했다. 주 15시간이면 주 4일 노동으로 해도 하루 4시간이 채 못 된다. 이 정도면 앞의 마르크스의 망상과 크게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여하튼 최근 무성한 4차 산업이니 AI니 하는 이야기들은 그 설레발이나 저의와 무관하게 생산력 혁신에 관한 케인즈의 예측이 실현되었거나 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케인즈가 말한 주 15시간 노동은 어디로 갔는가. 노동 시간은 줄지 않고 일자리만 줄고 있다. 일자리가 갈수록 더 빠르게 줄 거라는 게 모두의 걱정이다.

케인즈의 낙관은 왜 빗나갔을까. 사회가 잘못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발전과 생산력 혁신이 다수의 삶에 기여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자본의 이윤 추구에만 이용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수정과 관리가 사라지는 변화와 관련이 있는 건 물론이다. 다수는 그런 사회를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즉 일자리 없는 미래를 정당한 상황으로 보면서 근심한다. 암담하고 무력하다. 건물주의 자식이 아님을 한탄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 딱히 다른 선택은 없어 보인다.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생산력은 케인즈의 말마따나 주 15시간 노동으로 살아갈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문제는 생산력 혁신이 자본의 이윤 추구에만 이용되는 사회를 방치하는가 다수의 삶에 기여하는 사회로 바꾸어내는가다. 그 변화에 모두의 미래가 달려있다. 변화가 쉽고 평화롭기만 할 수 있다면 누군들 변화에 참여하지 않을까. 그러나 자본 쪽에서 순순히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적어도 상식적이고 선량한 정치로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는 아니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2017/07/16 13:43 2017/07/16 13:43

트랙백 주소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