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11:16
1997년 구제금융 사태를 빌미로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밀려들어오면서 한국 교육은 뿌리부터 바뀌게 된다.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로 이름을 바꾼 건 그런 변화의 표징일 것이다. 교육부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경제적) 자원’을 담당하는 국가의 부서가 된 것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가장 쉽고 간명하게 표현하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관한 일’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교육을 ‘아이가 얼마짜리가 될 것인가에 관한 일’로 바꾸어놓았다. 골목에서 사라진 아이들은 밤늦도록 학원을 돌고 시들고 부모들은 아이에게 인간에 대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가르치길 두려워하게 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자유로운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경쟁의 조건까지 같진 않기에 갈수록 부자의 아이들이 승리를 거두는 경향이 갈수록 늘어갔다. 그로부터 18년. 한국은 1%의 88억 세대 청년을 위해 90%의 청년들이 88만원 세대로 살아가야 하는 사회다. 계급 상승의 기회이던 교육은 계급 온존을 넘어 신분제 사회의 기반이 되고 있다. 청년들은 제 나라를 스스럼없이 ‘지옥’(헬조선)이라 부른다. 좌도 우도 감히 그 말을 부인하지 못한다.

교과들은 아이들의 가격표 매기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한다. 그 교과를 공부하는 이유나 의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가격표를 매기기 위한 수단도 아닌 예체능 교과는 존재 가치가 의심된다. 부모들에게 미술 시간은 안그래도 부족한 공부 시간을 좀먹는 시간일 뿐이다.  미술 시간은 중학교에선 대폭 줄고 고등학교에선 아예 선택 과목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중첩되어 있다. 미술 시간을 종전 수준으로 회복하고 필수 과목으로 되돌려놓는 일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 지경이 되기 이전의 미술 교육이 온전했던 것 또한 아니다.

미술 교육에서 ‘미술'은 일본이 서구 근대문물을 받아들일 때 ‘파인 아트’(Fine Arts)를 번역해 만든 말이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기술’ 정도의 뜻인데 오늘날 미술관과는 지나치게 동떨어지고 협소한 것이다. 미술은 더 이상 ‘아름다움’을 목표로 하지도 않거니와, 종래의 미술 범주를 넘어 온갖 형태와 방식의 시각 예술작업들을 포괄한지 오래다.

미술이라는 말은 이제 상당수의 사람들에겐 '시각예술'을 대신하는 말일 뿐이다. 그러나 보다 많은 사람들에겐 여전히 기존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 이중적 상태가 만들어내는 혼란은 미술교육에 치명적이다. 미술교육이 현대미술 혹은 동시대 미술의 조류를 실시간으로 따라야 하는 건 물론 아니다. 그러나 미술교육이 현재 실재하는 의미있는 미술 작업들에 대해 '저런 것도 미술인가?'라는 관점과 태도를 가르친다면 미술 교육을 할 이유가 사라진다. 명칭도 정체성도 '시각예술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미술 교육이 ‘실기’에 편중된 건 미술 교육이 '기술’이라는 기존의 미술관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미술 시간에 초등학생들은 크레파스로 중고생들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주는 유익이 있다. 그러나 그런 편중된 교육의 반복이 아이들로 하여금 미술에 대한 편중된 이해을 만들어내는 것도 사실이다. 대개의 아이들은 미술 작업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민, 즉 관객이 된다. 미술 교육은 그 사실에 조응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미술 교육은 실기가 아니라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안목과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고등학교 정도 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술관이나 전시장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할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근사한 풍경인가. 미술교육만 제대로 한다면 결코 몽상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의 본디 힘이 ‘쓸모’가 아니라 ‘쓸모와의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끊임없이 내 ‘경제적 쓸모’를 질문하게 함으로써 끊임없는 불안감에 젖게 하고 결국 내 삶을 모조리 앗아가버리는 몹쓸 세상을 살아낼 아이들이, 미술 전시와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안목과 능력을 갖는다는 건 ‘삶의 면역력’을 갖는 일이기도 하다.(월간미술)
2015/10/31 11:16 2015/10/3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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