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03 22:02
예술(과 문학)이 인간이 해내는 가장 멋진 일인 건 세상에 없는 형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예술이 만들어내는 형상 중엔 ‘세상 자체’도 포함된다. 예술가(와 작가)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존재해야 할 세상을 그려낸다.

물론 새로운 세계의 형상을 그리는 건 예술가만이 아니다. 활동가와 정치가도 세계의 형상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전위성의 순서는 다르다. 정치가는 지금 당장, 단기간에 실현 가능한 세계의 형상에 집중한다. 그들이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건 그들 꿈의 제한성이 갖는 콤플렉스 때문이기도 하다. 활동가는 정치가보다 더 꿈을 좇는다. 그러나 활동가의 임무는 꿈을 좇는 것보다는 꿈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데 있다. 예술가만이 그런 모든 제한을 벗어난 존재다. 예술가는 제 상상력으로 뭐든 그려낼 수 있다. 장기적인가 단기적인가, 이상적인가 현실적인가, 리얼리즘인가 문자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형식인가 따위는 상관이 없다. 요컨대, 예술가는 ‘무책임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상의 형상을 그려내는 존재다. 예술가가 그려낸 새로운 세상의 형상은 활동가에게 정치가에게 그리고 모든 사회성원에게 공급된다.

예술가의 전위성은 한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여부의 지표다. 강력한 사회변화의 시기, 변혁 혹은 혁명 직전에 예술가의 전위성이 폭발하는 건 그래서다. 그런 시공간이 예술가에게 전위성을 부여하며 예술가의 전위성은 다시 그 시공간의 근원적 에너지원이 된다. 반면에 정체된 사회, 온갖 모순과 억압과 착취가 팽배함에도 그에 걸맞은 싸움은 없이 헛발질만 난무하는, 지배 계급의 안정성만 더해가는 오늘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예술가의 전위성은 발견하기 어렵다. 그런 사회에서 예술가는 활동가보다 더 후위에, 심지어 진보적 경향의 정치가보다 더 후위에서 군락지를 이루며 연명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예술가의 전위성이 도드라진 시기는 해방 공간과 1980년대라 할 수 있다. 그 중 1980년대는 현재의 예술계와 닿아 있다. 1980년대의 전위적 청년 예술가들이 바로 현재의 중견 예술가들이다. 사회의 가장 전위에서 제 신체를 내걸고 상상력을 폭발하던 그들은 이제 활동가는 고사하고 진보적인 정치가보다 더 후위에, 이른바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시민들’ 속에 식별 불가능한 형체로 섞여 있다. 그들은 종종 ‘1980년대 민중예술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의미있는 일이다.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경도되어 예술적 상상력을 정치 강령과 바꿔먹은 편향에 대한 비판과 성찰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의 비판과 성찰은 현재의 전위성을 모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위성 자체를 폐기하기 위해, 그들이 ‘소싯적에 좀 했던 아저씨’로 행세하기 위해, 여전한 도덕적 우월감과 엘리트 의식으로 치장된 그들만의 군락지를 유지하기 위해 수행된다.

그러나 어떤 애석함도 전위성의 폐기가 오염된 강처럼 흐르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애석하진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난 대선 직전 젊은 시인·소설가 137명은 ‘우리는 정권교체를 원합니다 - 그로써 자유의 영토가 한 뼘 더 자라나리라 믿습니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가 진보적인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약자의 신음에 더 잘 귀기울일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 답은 정권교대가 아닌 정권교체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정권교체’란 지난 정권, 즉 노무현·김대중 정권으로 복원을 말한다. 두 정권이 과연 약자의 신음에 더 잘 귀기울였는가, 그럴 거라 기대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의 신망을 잃었는가라는 질문은 생략하기로 하자. 그러나 선언문은 소기의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137명의 작가들의 선언에 귀기울이거나 영향을 받을 사람 가운데 ‘정권교대가 아닌 정권교체’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137명의 작가들이 긴급하고 비장한 얼굴로 선언한 건 단지 그들이 전위성을 잃은 작가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예술가들이 도달한 최근의 전위성은 ‘착한 행동’이다. 용산, 쌍용차, 강정을 비롯한 주요한 투쟁 현장에 얼마나 얼굴을 비치는가, 돕는가가 전위성의 표현이 된 것이다. 지지하고 돕기는커녕 빨갱이들이라 비난하는 이들에 비하면 상찬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본색은 ‘착한 행동’이 아니라 ‘나쁜 행동’에 있다. 예술가는 여기저기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상찬받으며, 의식있는 사람으로 행세하려는 중산층 인텔리의 속물근성에 봉사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불온한 상상력으로 오히려 누구도 함부로 상찬하기 어렵도록 불편을 행사하며, 현재의 세상과 포탄처럼 충돌하는 ‘나쁜 사람’이다.

앞서 ‘무책임한 상상력’이라는 표현은 음악가 정태춘의 말이다. 그는 예술의 전위성을 맹렬하게 체현하던 주요한 예술가 중 하나였지만 ‘소싯적에 좀 했던 아저씨’가 되길 거부했고, 예술의 전위성을 폐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예술 활동의 중단을 선택했다. 그의 고뇌와 역설적 실천은 지금 이 순간 ‘예술가는 세상과 어떻게 충돌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미지의 예술가들에게 참고가 된다. 미지의 예술가들에게, 그들의 무기가 될 무책임한 상상력에 경의를 보낸다.(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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