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24 12:20
이미 박근혜를 반대하는 사람들끼리 박근혜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끝없이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은 세상에 아무런, 눈곱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비판이되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은 아니다. 그것은 ‘비판적 해소’다. 그 대상이 ‘박근혜’든 ‘민영화’든 ‘밀양 송전탑’이든 마찬가지다. ‘유유상종의 공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이른바 진보 경향의 미디어는 그런 비판적 해소로 차고넘친다. 민주노총 침탈이라는 박근혜 정부의 유례없는 만행은 우리를 비판적 해소라는 수월한 길로 더욱 유인한다. 이런 이야기가 마땅치 않게 느껴진다면, 2008년 촛불의 열정이 결국 어떻게 귀결했는지,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심판’의 열정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되새겨보는 게 좋겠다. ‘비판적 해소’야말로 오늘 우리의 가장 강력한 적인지도 모른다.

철도 민영화 반대 싸움은 많은 사람들을 비판적 해소의 문턱에 서게 한다. 철도 민영화와 관련한 사실관계들 때문이다. 철도 민영화는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철도를 4단계로 민영화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1단계는 철도의 시설부문과 운영부문 분리, 2단계는 철도청을 철도공사로 전환, 3단계는 철도공사의 경영 개선, 4단계는 철도 운영에 민간 참여로 경쟁체제 수립. 이명박 정부는 철도 민영화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가 노무현 정부를 이어받아 4단계를 추진하고 있다. 2003년 철도노조 파업 때 노무현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아니라 노조 지도부를 위한 노동운동, 정치투쟁은 정부가 보호할 수 없다”며 법에 따른 엄정 대처를 천명했다. 같은 해 노무현 정부는 화물연대 파업 지도부 검거를 위해 민주노총 건물 침탈을 시도했다. 이번과 다른 건 침탈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거리낌없이 전원 직위해제를 해버린 박근혜 정부의 태도는 야당의 그런 원죄가 깔려 있다. 그들은 지난 대선을 통해 ‘노무현의 FTA와 이명박의 FTA는 다르다’식의 말이 ‘이미 이명박과 박근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사람들에겐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합리적 사실’을 확인했다. 오늘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박근혜를 미워하는 만큼이나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박근혜의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지만 노무현의 철도 민영화와 관련한 사실관계를 인정하긴 꺼린다. 그들은 또한 김대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민영화를 반대하지만 한국에서 민영화가 본격화한 게 외환위기와 함께 집권한 김대중 정부에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역시 꺼린다. 그런 이중적인 혹은 감상적인 태도가 오늘 민영화 반대 싸움을 비판적 해소로 만드는 가장 주요한 힘이다.

민영화란 무엇인가. ‘공적 재산의 사유화’(privatiza-tion of the public property)라는 본디 말 그대로, 공적 서비스를 시장의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경기 침체로 혹은 지나친 탐욕으로 장사를 해먹을 곳이 충분치 않아진 자본(재벌과 초국적 자본)이 공적 서비스 영역의 담을 무너트려 장사를 해먹으려는 작업이다. 포항제철(포스코), 한국통신(KT), 한국담배인삼공사(KT&G) 등 공공성이 덜한 곳들은 진즉 마무리되었지만 전기, 철도, 가스, 우편 그리고 의료보험 등 본격적인 노다지는 아직 남아 있다. 최후의 노다지를 차지하기 위해 자본은 무려 15년 동안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동원하고 조직해왔다. 여론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직접 민영화보다는 민·관 합작이나 자회사를 끼워 넣는 방식으로 우회해가며 말이다. 그런 치밀한 적과의 싸움에서 민영화 15년의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인정하기 꺼리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까. 그러나 민영화 반대는 반드시 승리해야 할 싸움이다. 자본과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싸우는 절체절명의 전쟁이다. 자본이 승리한다면 자본의 지상천국이 만들어질 테지만 우리 삶과 아이들의 미래는 나락에 떨어진다.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과 관련한 비판적 해소가 단지 김대중,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민영화와 관련한 김대중, 노무현의 흠결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덮으려는 태도엔 우리의 흠결을 김대중, 노무현을 통해 덮으려는 욕구가 담겨 있다. 이미 우리의 삶이, 우리가 직접 운영하는 삶의 영역이 이론의 면에서나 실제의 면에서나 충분히 민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유신독재 시절에도 뛰어놀며 자라던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학원을 돌며 시들어가고, 1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현실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냉혹한 교육 민영화론자들이다. 민영화가 ‘유신공주만의 악행’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민영화를 들여다보는 건 참 불편한 일이다. 그 불편함이 우리의 전열과 싸움을 괜스레 맥 빠지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우리의 분노가 다시 한 번 비판적 해소로 사라지지 않게 함으로써 승리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학가의 수많은 ‘안녕’ 대자보 속에 붙은 한 엄마의 대자보는 후자의 한 사례일 것이다.

“너희들에게만은 인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는데…, 너를 키우면서 부끄럽게도 성적과 돈에 굴종하는 법을 가르쳤구나. 미안하다. 이제 너의 목소리에 박수를 보낸다. 82학번 너희들의 엄마가.”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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