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01 11:08
‘아이가 행복한 세상’을 내건 어린이 잡지가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는 보기 어렵다는 모순은 창간 이래 고래가그랬어(이하 고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극심한 사회적 양극화 속에서 아이들은 학과 성적은 물론 문화적 환경에서도 해가 다르게 큰 격차를 보여 왔다. 2005년 어느 날 함께 고민을 나누던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고래동무’라는 후원단체를 만들었다. “세상의 흐름을 당장 바꿀 순 없지만 고래만은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가보자. 부잣집 아이 중에 고래 못 보는 아이는 있어도 가난한 집 아이 중에 고래 못 보는 아이는 없게 하자.” 고래이모, 고래삼촌이라 불리는 후원자들은 2800여 곳의 공부방과 보육원 등에 고래를 보내고 있다. 한 곳 평균 30명이니 8만여 명의 아이들이 고래동무를 통해 고래를 받아보는 셈이다.

그런데 초기엔 고래이모나 고래삼촌이 항의를 해오는 일이 잦았다. 통장에서 후원금은 꼬박꼬박 빠져나가는데 후원받는 아이들에게서 아무런 피드백도, 하다못해 엽서 한 장 없다는 것이다. 항의는 다른 후원에서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었다. 한국의 어린이 관련 자선단체들은 후원받는 아이들의 적극적인 피드백이 일반적이다. 한 유명 여행 작가가 한참 홍보에 나섰던 자선단체는 직접 결연 방식이 아닌데도 아이에게 엽서를 쓰게 해서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얼마나 불쌍한 아이로 보이게 하는가, 아이가 얼마나 감동한 얼굴로 사진을 찍고 엽서를 쓰게 하는가는 단체의 실적을 가르는 일로 여겨진다. 전엔 자선 단체 홍보물에 등장하는 아이 사진이 ‘아사 직전의 불쌍한 아이’가 대세였지만 근래 들어선 ‘맑고 큰 눈을 가진 불쌍한 아이’가 대세라던가.

사람이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아름다운 일인 만큼이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일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도 도움을 주는 사람과 다름없는 자존감과 존엄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존감을 해치거나 씻기 어려운 상처를 줄 수 있다. 형제 사이든 친구 사이든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받았는데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도움을 준 사람은 상대가 배은망덕하다고 여기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 과정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힘들어한다. 그런데 자선 단체를 통한 후원자와 아이는 왜 그리 미소와 감동만 가득한 걸까. 왜 아이는 사진이 찍히고 엽서를 쓰면서도 전혀 자존심 상해하지도 상처받지도 않는 걸까. 외양과는 달리 인간적인 결합도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자존심 상할 일도 상처를 줄 일도 없을 만큼 말이다.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굶는 아이가 존재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먹을 것까지 이악스럽게 차지한 소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가 적절히 분배되고도 그리 많은 아이를 굶겨 죽일 수밖에 없는 나라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꼴을 갖춘 어린이 잡지와 책을 공부방이나 도서관 등 아이들이 모이는 공공시설에 더도 말고 한권씩 비치하는 건 한국에서 당장에라도 실현 가능한 일이다. 필요한 건 단지 제정신을 가진 정부와 정책뿐이다. (비록 우린 단 한 번도 그런 정부를 가져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제대로 교육받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는 건 아이가 가진 당연한 권리다. 당연한 권리를 행사할 뿐인데 감동할 이유도 감사의 엽서를 쓸 이유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 권리를 나라에서 마련하는가, 나라가 신통치 않아서 후원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마련하는가는 매우 다른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어른들끼리의 일일 뿐 아이들이 부담감을 갖거나 책임질 이유는 없다. 초기에 피드백과 관련해 항의를 해오기도 하던 고래이모, 삼촌들도 소통과 토론을 통해 이젠 그런 생각에 다들 공감하고 있다.

자선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냉소해선 안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나 역시 몇 곳의 자선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있지만, 요즘 같은 경제 상황에서 달마다 꼬박꼬박 제 벌이를 헐어 내는 일이 어디 쉽기만 한가. 그러나 자선은 그 자체로 완성된 해결책이 아니다. 자선은 불공정한 사회구조와 제정신이 아닌 문화정책을 바로 세우는 해결책이 아니라, 해결하는 동안 고통 받는 아이들을 위한 긴급한 임시방편이다. 자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아름답지만 자선의 구조는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자선의 구조가 아름답게만 묘사될수록 그 자체로 완성된 해결책이라 여겨질수록 아이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아 가는 불공정한 구조와 정책은 은폐되며 영속화한다.

자선의 목적은 ‘자선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불쌍한 아이’를 돕는 이유는 불쌍한 아이를 돕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쌍한 아이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쌍한 아이’는 이미 그른 말이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우리가 미안해해야 할 아이가 있을 뿐.(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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