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29 18:27
“아이들이 왜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는 걸까요.” 화기애애하던 질의응답 시간이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했다.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밥을 굶어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아이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그런 선택을 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철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람이 철학을 갖는다는 게 뭘까. 인간과 세계에 대해, 삶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길 멈추지 않으며 나름의 관점과 태도를 갖는 것일 게다. 그리고 현실이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더라도 그 관점과 태도에 기대어 사람 꼴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일 게다. 그렇게 볼 때 옛사람들은, 아니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다들 삶의 철학자였다. 철학교사였다. 그들은 아이에게 늘 예사로 말하곤 했다. “혼자만 잘살면 뭐해 함께 살아야지.”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일도 좋지만 놀 줄도 알아야지.” “동무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해.” “미물도 함부로 해치는 게 아니다.” “사람이 너무 탐욕 부리면 죄받는다.” 등등.

별스러울 게 없어 보이면서도 참 정연한 철학들이었다. 그리고 참 무서운 가르침들이었다.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셀 수 없이 반복되는 그 가르침이 사람 꼴의 하한선을 만들어냈다. 아이들은 사람임을 되새길 줄 알며, 이기적 욕망을 공동의 가치로 견제할 줄 알며, 소박하고 정직한 삶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보다 못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들로 자라났다. 그런 사람들이 이웃과 마을을 이루고 정이 흐르는  세상을 만들었다.

물론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다 훌륭하진 않았다. 윗사람에 대한 무작정한 순종을 강조하거나 여자는 남자의 보조적 존재라는 따위 생각은 얼마나 모자란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인간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억압하는 전근대적 습속이라 지목했고 열심히 내다 버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우리의 삶은 이렇게 자유롭지도 주체적이지도 않을까. 예전엔 어지간히 탐욕을 부리며 살아가는 사람조차도 아이에게 가르치던 삶의 철학을 왜 우리는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조차도 가르치길 두려워할까.

자본주의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최대의 사람이 최대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공리주의의 기치 아래 모든 사람이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저와 제 새끼의 행복을 추구하느라 늘 불안하고 늘 피 터지는 세상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이상 삶의 철학자도 철학교사도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되면 살기 좋아질 줄로만 알던 우리가, 민주화와 함께 도착한 본격적인 자본주의에 의해 영문도 모른 체 내몰리면서 철학을 지켜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사정이 어떻든 ‘밥을 굶어도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라는 철학이 사라짐으로써 우리의 삶은 밥을 굶을 때보다 더 초라해졌다.

삶의 철학자들이 사라진 자리는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시대의 정언명령이 들어섰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철학 책과 철학 강좌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 책과 강좌들은 우리가 불편을 무릅쓰고 삶과 세계와 대면하는 일을 외국철학자의 이름이나 개념을 외우는 일로 대신하게 해준다. 간혹 그걸 넘어서는 ‘이게 다 자본주의 탓’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정언명령 앞에선 어김없이 멈춘다.  멈추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그 철학 책과 철학 강좌가 철학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면 더는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 책과 철학 강좌는 ‘철학 공부’가 아니라 ‘철학 청소’를 소임으로 하게 되었다.

옛 사람들은 철학 책이나 강좌 없이도 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들의 부모가 이웃들이 모두 삶의 철학자들이었으니. 그들과 눈을 맞추며 대화하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철학공부였으니. 마을 사람들은 움직이는 철학 책들이며 마을은 살아 숨쉬는 철학도서관이자 철학학교였으니. 오늘 아이들에게도 부모와 이웃과 마을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철학교사도 철학도서관도 학교도 아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건 인간의 성장이 아니라 성공에 관한 것들이다.

아이들은 사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자라난다. 아이들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인지라 제 삶과 세계에 대한 답답함과 막막함에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우리는 한목소리로 그들의 입을 막는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 그 아이들 중 몇몇은 답답함과 막막함에 기진하여 스러져간다. 그 아이들에게 우리가 정색을 하고 ‘생명은 소중한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말한들 울림이 있을까.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철학의 복원이다. 우리가 삶의 철학자가 되고 철학교사가 되고 손잡고 철학도서관과 철학학교를 이루는 것이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어른이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부끄러운 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현실이 어렵더라도 사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길 멈추어선 안 된다고 아이들에게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그럴 의무가 있다. 기억하겠지만, 우리가 그 아이들을 세상에 나오게 했다. (경향신문, 혁명은 안단테로)

2013/07/29 18:27 2013/07/2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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