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09 09:51
“학교 가는 거랑 방학 때랑 똑같은 거 같아. 방학 때도 오전에 학원가고 공부하고 해야 해.” “솔직히 말하면 방학 때보다 학교 가는 게 나은 거 같아. 학교에서는 여유롭게 친구들이랑 이야기 나눌 수도 있는데 방학 때는 그런 게 어려우니까.” “있으나마나야. 방학이라고 맘대로 놀 수 있는 것도 아니고.”(고래가그랬어 116호 ‘고래토론’에서)

방학을 앞둔 4학년 아이들의 토론이다. ‘신나는 방학’이라는 고전적 표현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했지만 ‘있으나마나한 방학’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니 마음이 답답했다. 만일 이런 상황이 동네에서 딱 한 집의 일이라고 가정을 해보자. 30년 전처럼 말이다. 그럼 동네 사람들이 그 집 부모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미쳤다’ ‘애를 잡는다’고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안 그럴까. 이유는 단순하다. 온 동네가 다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다. 지금 아이들이 30년 전 아이들과 달리 방학이 있으나마나해도 무방한 체질을 가진 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다르지 않다. 그저 온 동네가 다하는 일이기 때문에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는 것이다.

손가락질은 오히려 그런 대열에 끼지 않은 부모들이 받는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는 학과 성적에만 몰두하지 않으려는 부모들이 꽤 된다. 특히 진보적인 경향의 부모들은 그런 경우가 훨씬 많다. 다양한 체험과 공부를 중시하며 아이를 데리고 들로 산으로 다니느라 학교에 빠지는 일도 잦다. 그러나 고학년이 되면 부모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며 하나둘씩 빠져나간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 적이 민망한 얼굴로 말하며 말이다. 그러나 그 수는 곧 역전된다. 다수가 된 빠져나간 부모들은 몇 안되는 남은 부모들을 ‘비현실적’이라고 손가락질한다. ‘비현실적이다’ ‘아직도 저러고 있다니’ ‘아이를 희생시킨다’ 등등.

그 ‘현실’은 결국 대학입시다. 그런데 이게 좀 묘한 현실이다. 30년 전처럼 대학 진학률이 20퍼센트가 채 못 되던 시절엔 대학을 나왔다는 건 꽤 ‘현실적’ 변별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대학에 가지 않는 아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을 막 졸업한 청년이 만나는 일반적인 현실은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다. 그런데 고작 이걸 위해 엄마는 30, 40대를 다 바치고 아빠는 사교육비를 대느라 등골이 휘며 아이는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10대의 낭만도 누리지 못한 채 시들어가는 게 현실적인 걸까. 아이가 아이답게 자라도록 도우면서 일찌감치 아이 적성에 맞게 소박하지만 자존감을 지키며 먹고살아갈 길을 준비하는 게 더 현실적일까. 그러나 다들 말한다. ‘대학을 나와도 안 되는데 대학도 안 나오면 어떡하나.’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이쯤 되면 우리는 ‘현실적’이라는 게 무엇이며 ‘비현실적’이라는 게 무엇인지 되새겨볼 만하다. 오늘 ‘현실적’이라는 말은 현실이 주는 불안감에 짓눌려 현실에 눈을 감은 다수가 자신을 설명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그 다수가 현실을 여전히 직시하려는 소수에게 느끼는 불편함을 지레 공격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아이들 교육에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진보적인 부모들 이야기를 했으니 그들의 정치 의식을 예로 들어보자. 지난 20년 이상 진보적인 시민들은 대선 시기가 되면 노동이나 계급적 의제를 중시하는 진보정치의 독자성이 중요하다는 견해와 일단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에 연대해야 한다는 견해로 팽팽하게 대립했다. 그리고 정치적 견해는 전자이면서 고심 끝에 후자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적이 민망한 얼굴로 ‘현실이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선 그런 선택이 절대다수가 되면서 더욱 위기에 빠진 진보정치의 독자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비현실적’이며 ‘낡고 교조적’인 사람이라 손가락질 받았다.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는 노동과 계급적 의제를 무시해도 좋은 사회가 되었는가. 오히려 더 강조해도 모자랄 사회가 되지 않았던가. 노동과 계급적 의제가 정치에서 소거될수록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방학이 있으나마나라고 말할 지경인 교육이 지속되면 우리 사회는 공멸한다는 것, 그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 그 현실에 눈을 감는 것은 ‘현실적’이라 일컬어진다.

이런 극단적 혼미함 속에서 현명함을 회복하는 좋은 방법은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다. 역사에서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대개 지금 우리와는 달리 주로 현실의 기득권 세력이 이상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말이었고 이상주의자들은 그걸 명예롭게 생각하곤 했다. 비현실적인 것, 지금과 다른 현실이야말로 그들의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현실적 소망들은 하나씩 엄연한 현실이 됐다.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자유니 평등이니 민주주의 절차니 하는 것들이 다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가 ‘비현실적’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 파시즘에 사로잡힌 세상처럼 말이다. 우리는 또한 그런 세상의 희망은 오히려 ‘비현실적’이라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에게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경향신문-혁명은 안단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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