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5/27 12:32
진보넷 게시판에서 일어난 여성주의 문제와 관련한 얼마간의 논란을 위해 쓴 '정리 글'. 나와 여성주의 문제에 대한 그간의 논란에 대한 '포괄적인 정리 글'로도 읽혀지길 바란다.



그제 밤 어느 분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편지는 근래 이 게시판에서 불거진, ‘여성주의에 대해 저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면서 저에게 비판적인’ 분들의 생각을 저에게 사려 깊게 알리려는 것입니다. 급하게 씌어졌음에도 편지는 그런 내용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담고 있습니다.
여성주의에 대한 제 생각을 폭넓게 개진하는 것도 좋지만, 불거진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해명하는 게 ‘연대와 존경’을 위해 좀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애초 쓰려던 글을 뒤로 미루고 편지에 답을 다는 방식으로 제 생각을 적어 봅니다. 문장 앞의 이름은 ‘읽기 좋으라고’ 제가 단 것입니다.


(고유미) 안녕하세요? 저는 고유미 라고 합니다.
저는 그저 김규항 님의 독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근래 진보넷 독자게시판에서 일고 있는 소모적인 '소동'을 김규항 님이 그만 종식시켜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다소 뜬금없는 메일을 보냅니다.
더욱이 내일까지 입장 글을 올리겠다는 글을 보고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김규항) 관심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고유미) 2년 전부터 계속된 김규항 님을 둘러싼 여성주의 관련 논란을 지켜보면서 제가 한 생각이며, 가능하면 내일 입장 글에 이에 대한 입장 혹은 해명이 실리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김규항 님이 여성주의자들의 비판 지점을 비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오히려 제 글이 김규항 님에게 그야말로 헛다리 긁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합니다. 다만 진정으로 작은 도움이나마 드리고 싶습니다.

(김규항) 저는 2년 전 ‘그 페미니즘’과 그 글을 보충하는 ‘그년들과 그놈들’을 쓰고 여성주의 문제에 대해 침묵해왔으니, “계속되었다”기 보다는 재연되었다고 하는 게 좀더 정확하겠지요. 어쨌거나 한번은 짚고 넘어갈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고유미) 김규항 님의 여성주의 비판 내용의 타당성을 떠나서, 김규항 님은 김규항 님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지점이 김규항 님의 비판을 둘러싼 전제 혹은 기저에 대한 문제제기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김규항) 제가 ‘감정적인 비난과 인격적인 재단’ 속에서 그런 섬세한 비판을 발견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만일 고유미 님처럼 “제 비판의 타당성”을 별개로 인정한다면 그런 비판에 귀 기울이는 게 당연하겠지만 아예 “제 비판의 타당성”을 무시하는 상태에선 제가 귀 기울일 방법이 없습니다. 제 비판이 ‘여성주의 전체를 비난’하는 것이라 악의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과 구분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유미) 즉 김규항님은 스스로를 '마초'라고 명명하는 대신 '여성주의자'로 명명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남성으로서 생물학적인 혹은 사회적인 한계 때문에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여성주의자'로 명명하는데 주저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김규항) 말씀 그대로 ‘자괴감’ 때문입니다. 여성주의를 지지한다고 해서 여성의 억압을 실제 갖지 않는 내가 ‘여성주의자’를 자처하는 건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유미) 그러나 김규항님의 평소 여성주의 지지자로서 자신을 규정한 태도를 볼 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김규항) 동감합니다. 저도 근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고유미) 여성주의 지지자와 여성주의자가 다른 겁니까? (사회주의 지지자와 사회주의자가 다른가요? 혹은 인종차별주의 지지자와 인종차별주의자가 다른가요?) 남성 지식인들은 노동자가 아니면서도 노동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그에 대한 비판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김규항) 개념적으로 다르지만 우리가 말하려는 의미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밝혔듯이 저는 “좌파는 당연히 소수자주의자이며 여성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고유미) 이런 생각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김규항님이 스스로를 '마초'라고 명명하는 것은 논쟁에 있어서 '무책임하고 비겁한' 태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여성주의를 비판하면서, 비판 내용에 대한 여성주의자 당사자로서의 책임은 회피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또한 '마초'로서 이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훌륭한 것이 되고 맙니다.

(김규항) 정확한 지적이고 제가 분명히 반성할 부분입니다.
그와 별개로 우리가 함께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비판한 게 과연 ‘여성주의의 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여성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주의 영역에서 유발되었으나 이미 전체 사회로 비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영역의 문제가 그 영역을 넘어 사회문제로 비화하는 이유는, 그 문제가 그 영역 전체의 것이거나 적어도 그 문제가 그 영역에서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 문제에 대한 비판의 자격을 제한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둘째는, 모든 여성주의가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하나인가, 하는 것입니다. 90년대 이후, 말하자면 ‘절차적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전체 사회운동은 빠른 속도로 보수화합니다. 사회운동의 주류는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다시 말해서 주류 사회운동의 대상은 ‘민중’에서 ‘시민’으로 바뀌었습니다. 여성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민운동이 ‘시민들의 일상문제’에 천착하듯이 90년대 이후 여성주의는 여성이 갖는 두 가지 억압(계급, 여성) 가운데 ‘여성’에 좀더 집중해왔습니다. 물론 그런 경향은 여성의 억압이 계급 문제에 가려지거나 생략되는 일을 바로잡는 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향이 ‘계급’ 문제를 희석화하는 경향을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처럼 주류 여성주의의 대상이 갈수록 중산층 지향적일 경우 중산층 이하의 여성에 좀더 집중하는 대상으로 하는 좀더 진보적인 여성주의가 주류와 분명한 긴장을 이루는 건 당연합니다. 그럴 때 두 여성주의는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라는 건 대등한 두 갈래가 아니라 단지 ‘보수에 편입된 상태’를 뜻합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알다시피, 이런 문제는 서구에서도 페미니즘이 백인 중산층의 전유물이 되었다는 비판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고유미) 대신 김규항님이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로 명명했다면 여성주의자 당사자로서 비판의 내용이 훨씬 정밀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김규항) 동감합니다.

(고유미) 또한 "박근혜를 지지하는 여성들은 진정한 여성주의자가 아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일군의 여성주의자들을 반대한다." 이렇게 주장했다면, 불필요한 '주류' '비주류'에 대한 오해는 없었을 것으로 봅니다.

(김규항)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범주 문제’에 대해 조금 부연하고 싶습니다. 저는 ‘지지하는 여성주의자들’을 비판한 게 아니라 ‘그런 여성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침묵’을 비판한 것입니다. ‘주류’라는 표현도 그래서 나온 것이지요.
사실 ‘여성의 이름으로 박근혜지지’ 같은 엉뚱한 주장은 어느 소수자 운동에서나 나올 수 있습니다.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에게서, 혹은 ‘소수자의 정서적 연대감을 악용하는 보수파’에 의해서, 좀더 정확하게는 그 둘의 결합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견은 대개 그 소수자 영역 내부에서 비판과 성찰을 통해 해결되기 마련입니다.
지난번 어느 분이 노들야학 박경석 교장 글을 올려주셨는데, 장애인 운동으로 가정을 해보지요. ‘파시스트의 정치적 자식’이 장애인이라 해서 ‘장애인 운동의 이름으로 지지하는 일’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진보적 장애인운동가들이 말 그대로 난리를 냈겠지요. 의견을 담은 매체나 사회적 영향력이 한계를 갖는다면 (그들이 늘 하는 대로) 몸을 묶고라도 시위를 하겠지요.
만에 하나 ‘광범위한 침묵’을 보인다면, 역시 장애인운동의 영역을 넘어서는 사회 문제가 됩니다. 반민중적 주장은 어떤 소수자의 이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내 외부를 막론하고 ‘장애인운동을 위하여’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비판을 “장애인 운동 전체를 비난했다”고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제 비판이 “전체 여성주의를 비난했다”는 해석은 제 비판의 대상인 보수적 여성주의자들이 제 ‘비판의 타당성’을 흐리기 위해 해온 말입니다. 그런데 제 비판의 대상이 아닌 여성주의자들이 제 비판을 “비판의 타당성”은 제쳐둔 채 ”비판을 둘러싼 전제 혹은 기저에 대한 문제제기“만 하는 게 온당한 일일까요. 게다가 감정적인 반감에서 “전체 여성주의를 비난했다”고까지 비난하는 게 말입니다.
앞서 말했듯, 소수자 운동의 보수 부분은 언제나 소수자들의 ‘정서적 연대감’을 악용합니다. 보수적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주의 내부의 비판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미약한 수준인 데다, 사회적 비판 역시 ‘정서적 연대감’을 통해 흐려버리니, 결국 아무런 비판을 받지 않게 됩니다. 2년 전의 박근혜 지지론이 여전히 활개 치는 상황은 바로 그 결과인 셈입니다.
‘박근혜 지지론을 말하는 방식’에 대한 지적을 수용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박근혜 지지론을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박근혜 지지론’인 것입니다. 그런 보수적 주장의 확산이 가져올, 여성주의의 보수화, 즉 중산층 이하 여성들의 ‘배제’와 ‘고통’인 것입니다.

(고유미) 여성조차도 여성주의자로서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여성주의에 대한 외부의 '논평'이 필요한 게 아니라, '링' 안에서의 치열한 자기 연마와 올바른 여성주의를 위한 투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김규항님은 줄곧 여성주의 비판 내용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름'에 초점을 맞춰 해명합니다. 김규항님은 여성주의자 당사자로서 논쟁에 임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김규항) 동감합니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는 내부 외부를 가를 수 없습니다. 진보적인 여성주의가 보수적 부분을 견제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 전까지는 얼마간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진보적 여성주의자들이 비판을 제기하고 저 같은 사람은 ‘비판의 존재’를 부각하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전략은 서로 간의 신뢰가 회복된 이후의 문제겠지요.

(고유미) 둘째 김규항 님 같은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지식인이 스스로를 너무나 당당하게 '마초'라고 명명하는데 놀랐습니다. 그건 마치 김기덕이 여성에 대한 소름끼치는 폭력을 능청스럽게 영화로 만들어 놓고 그러게 애초에 '나쁜 남자'라고 했잖아 라고 물러서는 비열함이 연상됩니다. 여성들이 어떤 단어에 대해 감성적으로 느끼는 적대감을 남성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김규항) 앞서 말했듯, 그 말은 저의 자괴감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 단어 자체가 가질 거부감을 좀더 감안하지 못한 건 사려 깊지 못했습니다. 그 단어에 상처를 받은 분들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고유미) 다음으로 김규항님이 반복해서 지적하는 여성주의자들의 '박근혜 지지자'들에 대한 방관 내지 침묵에 대한 것입니다. 그 문제가 불거졌을 때 여성들은 경악했으며, 여러 매체에 열심히 여성 혹은 여성주의를 팔아 박근혜를 지지하는 경향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제가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수없이 접했던 그런 비판들을 김규항 님은 하나도 읽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김규항) 당시 상황은 ‘광범위한 침묵’이라 말하는 게 좀더 보편적입니다. 물론 침묵은 ‘지지’와 다릅니다. 그러나 ‘반대’ 보다는 ‘공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수없이 접했던 그런 비판들”이 보편적인 차원에서는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저는 그걸 빌미로 여성주의 전체를 비판한 게 아니라 그런 부당한 현실, 침묵과 공감을 표시하는 여성주의 부분만 부각되고 비판적인 여성주의 부분은 존재 자체가 철저히 배제되는 현실에 주목한 것입니다.
제 비판에 대한 일정한 ‘사회적 공감’이 여성주의 전체에 대한 반감을 확산시켰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의 모호한 상태와 관련이 깊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거의 모든 한국 교회’(‘주류 교회’도 아니고)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빙자한 상점”이라고 공공연하게 비판해왔는데, 그런 비판에 해당하지 않는 교회나 목회자에게서 단 한번도 ‘교회 전체에 대한 비난’이라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 비판의 방식이나 자격 이전에 그런 비판에 해당하지 않는 교회나 목회자들이 ‘거의 모든 한국교회’를 내부는커녕 교회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성주의자들의 반감이 고유미 님 말씀대로 “제 비판을 둘러싼 전제 혹은 기저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반감이 전적으로 그것에서만 나오는 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런 반감은 오히려 그런 반감을 갖는 분들의 모호한 상태와도 관련이 깊습니다. “제 비판의 타당성”을 인정하거나 제 비판을 ‘사회적 연대’라 파악하는 여성주의자들이 많다는 건 그 사실을 반증합니다.

(고유미) 물론 '한겨례' 같은 유력 일간지에 실리지 않았을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여성주의로 밥을 먹고 눈 떠서 잠들 때까지 여성주의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여성주의자들에게 마이크를 갖다대지 않고, 김규항님처럼 가끔씩 툭툭 던지는 비판을 우선적으로 실어줄 만큼 김규항 님의 사회적 발언력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김규항) 저에게 얼마간의 발언력이 있는 건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저의 “사회적 발언력”이 아니라 “고민하고 실천하는 여성주의자들”을 압도하는 보수화한 여성주의자들의 “사회적 발언력”입니다.
내부인가 외부인가 여성인가 남성인가, “비판을 둘러싼 전제 혹은 기저”가 어떤가를 얼마나 바람직한가를 떠나서, 의견의 타당성이 어떤가를 중시해야 할 이유가 그것입니다. 어떻게든 압박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걸 부인한다면 자신의 건전성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유미) 여성주의가 동의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해방, 인간해방과 본질적으로 연결된 부분임을 인정한다면 진정한 진보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김규항님이 여성주의자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봅니다.

(김규항) 앞서 말한 대로 “좌파는 당연히 여성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고 정당하게 드러내도록 하겠습니다.

(고유미) 솔직히 남성진보주의자들보다 일반 혹은 '중산층 여성들'에게 내 문제를 훨씬 공감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자신들과 연대하지 않으면 여성주의를 진정한 진보주의로 인정해 줄 수 없다는 남성 진보주의자들의 그 몰이해와 편협함에 커다란 벽을 느끼기도 합니다.

(김규항) 여성에게 계급적 억압과 여성의 억압이 동시에 존재하고 좌파남성들의 의식이 아직은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런 ‘공감’은 당연한 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좌파운동과 진보적 여성주의가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운동은 억압에서 해방하는 싸움이고, 운동이 가장 집중한 부분은 억압이 가장 심각한 부분입니다. 좌파는 ‘계급’에서 출발하고 여성주의는 ‘여성’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가장 억압이 심한 부분은 같습니다. 가장 하층계급이면서 가장 많은 여성적 억압을 갖는 게 누구입니까. 바로 ‘가난한 여성’입니다.
여성주의가 가난한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가난한 여성을 우선으로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건 모든 소수자 운동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건전한 장애인운동이 가난한 장애인, 특히 ‘가난한 여성 장애인’을 가장 우선으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여성주의에서 ‘진보’가 뗀다면 그 원칙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보수적 여성주의는 그 원칙에서 적대적입니다.
좌파남성과 진보적 여성주의자들이 연대와 존경을 향해 나가는 도정에 있다는 사실에 피차 더욱 진지해져야 합니다. 좌파남성들이 보이는 문제들은 그들의 의도나 입장이라기보다는 오래 시간 길러온 가부장적 관습, 말하자면 ‘못된 버릇’이 대부분입니다. 그게 자신의 이념과 관련이 있다는 걸 미처 모르는 것이지요. 관습은 고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치기 어렵다는 건 고칠 수 없다는 것과 다릅니다. 보다 분명한 건 고쳐서 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성주의자들이 좌파남성을 불신과 적대감으로 대하는 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저도 소속한 단체가 있지만 현재 좌파 남성 가운데 공공연한 성차별 의식을 드러내는 경우는 찾기 어렵습니다. 이게 불과 최근 몇 해 동안의 변화입니다. 성폭력 사건처럼 뚜렷하게 불거진 문제에 대한 변화는 좀더 잠복한 문제들의 변화가 임박했음을 드러낸다고 봅니다. 여성주의자는 좌파남성의 현재 상태에 비판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좌파남성이 더욱 변화할 테니까요. 그러나 동시에 그 변화의 어려움을 배려해야 합니다. 여성주의자에게 좌파남성은 적이 아니라 ‘미숙한 동지’입니다.

(고유미)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내가 지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당사자로서의 심층적인 문제를 아직 인식하지 못한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대한 접근 혹은 비평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비판이 당사자들에게는 뜬금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규항) 동감합니다. 오해의 책임이 누구인가를 떠나서 오해를 충분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제 책임입니다. 아울러 어떤 사회적 의견을 제출하는 데 있어, 부정적 부분을 비판하는 방식(이 꼭 필요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보다는, 건전한 부분을 부각하고 힘을 실어주는 방식을 사용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고유미) 급한 마음에 두서없이 작성한 글에 제가 염려하는 부분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걱정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입장 글에서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김규항)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제 의도는 여성주의에 대한 ‘연대와 존경’입니다. 결국 이 공간에서 불거진 문제는 그 의도를 표현하는 방식과 그 의도를 수용하는 방식 사이의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런 문제로 서로의 의도를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고유미 님이 권유하신 대로 제가 제 자신을 ‘여성주의자’라 명명하는 건 그런 노력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급하게 씌어졌지만 매우 일목요연한 편지였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모든 기자들께 : 이 글을 맥락과 관계없이, 혹은 맥락을 생략한 채 인용하거나 사용하지 말기 바랍니다.]
2004/05/27 12:32 2004/05/27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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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스피드

    Tracked from XY MAP 2004/06/02 07:25  삭제

    <FONT face=굴림 color=#006699><STRONG>내부인가 외부인가 여성인가 남성인가, “비판을 둘러싼 전제 혹은 기저”가 어떤가를 얼마나 바람직한가를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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