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5/20 09:32
호찬, 화진 커플의 결혼식 주례를 맡기로 했다. 물론 처음이다. 전에 같은 부탁을 받았을 때 한 순간도 고민한 적 없는데 이번엔 3일 동안 고민했다. 두 사람의 부탁이 워낙 진지하고 완강했기 때문이고(거절하면 주례 없이 강행하겠다는 식의 공갈을 포함한), 나 또한 두 사람의 사는 모습이 예뻐 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결심은 ‘한국의 관혼상제 형식에 비슷한 거부감을 가지면서, 이미 주례를 해본 동년배’인 강유원 형의 체험에 의탁했다.

아래는 (내 주례사의 “inspired by"가 될) 강유원의 주례사다.


이 결혼식에 참석하신 하객들은 주례를 맡은 이가 턱없이 젊은 것에 어이없어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래 주례는 따로 있는데 급한 사정 때문에 식장에 당도하지 못한 탓에 부랴부랴 신랑의 가까운 친지나 선배를 단상에 세운 것이라 짐작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만 합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저는 일반적인 기준에 비추어 볼때 주례를 설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신랑과 나이 차이가 많지 않으며 결혼 생활을 성공적으로 영위하기로 이름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조금은 쑥스럽고 어색합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이 주례를 위해 준비한 바가 없지는 않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10년 만에 넥타이를 하나 새로 샀습니다. 제가 지금 매고 있는 넥타이가 그것입니다.

신랑 오창엽군에게서 주례를 부탁받고 선뜻 승락을 하지 못한채 '왜 나에게 주례를 부탁했을까'를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이유를 찾아 보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찾은 이유가 오늘의 주례사가 될 듯합니다.

돌이켜 보면 이른바 한국의 현대사는 극심한 혼란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 혼란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많은 지식인들은 곡학아세와 변절을 일삼아 왔습니다. 모든 것이 체제내화된 90년대 이후에는 '변절'이라는 말 자체가 어이없는 형용사가 되어버린 분위기마저 생겨났습니다. 어제의 투사가 오늘은 주류가 되어 삐까번쩍함을 뽐내고 있습니다.

저는 오창엽군을 알아온 이래 적어도 그런 인간 잡종들에 속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아마 그런 까닭에 신랑에게 주례로 뽑히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자리에 선 신랑.신부는 지식인들이 저지르는 대세와는 무관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주례를 하는 저 역시 꿋꿋하게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해봅니다. 세월이 흘러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고 부끄러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엉망으로 망가져서 훗날 신랑.신부의 입에서 '그런 인간에게 주례를 맡겼던 우리가 정말 바보였지'라는 개탄이 나오지 않도록, 또 제 입에서 '내가 왜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들 주례를 섰던 말인가'하는 한탄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자리는 결혼식장입니다만 동시에 참석하신 하객 모두와 함께 이러한 다짐을 서로 주고받는 자리이기도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4/05/20 09:32 2004/05/2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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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결혼식 주례 결정

    Tracked from HOCHAN.NET 2004/05/20 09:52  삭제

    우여곡절 끝에 김규항 선배께서 결혼식 주례를 맡아주기로 하셨다. 고마운 결정이다. 무작정 부탁드리면서 내가 감히 주례의 조건으로 말씀드린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나와 신부 둘 모두 존?

  2. Subject: 시험

    Tracked from 당당하게 2004/05/20 14:48  삭제

    도대체 어찌하는 걸까

  3. Subject: 주례와 주례사

    Tracked from 맑스네♬ 2004/05/21 18:04  삭제

    <BR><FONT size=2><FONT face=times>&nbsp; <STRONG>주례와 주례사</STRONG></FONT></FONT> <BR><FONT

  4. Subject: online loan

    Tracked from online loan 2013/04/08 12:59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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