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4/20 16:30
전북 태인이 고향이지만 아버지가 군인(공군 하사관)이었던 덕에 셀 수 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다. 전라 경상 충청 경기 할 것 없이 남한에서 비행장 있다는 고장은 다 살아 봤고 그 고장에서도 이런저런 형편 때문에 수시로 이사를 다녀야 했으니 기억하는 이사 횟수만 스무 번은 넘는다. 여섯 살부터 초등학교 4학년까지 살았던 대구는 매미가 다닥다닥 붙은 사과나무의 환영과 가슴 아린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은 곳이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가리켜 말하곤 했다. "김 상사 네는 전라도 사람 같지 않아."

그 희한한 칭찬은 어린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런 '칭찬'의 반복은 나로 하여금 전라도 사람이 어떤 큰 죄를 가진 사람인 모양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아버지에게 그 일을 따져 묻는 게 예의가 아니고 소용없는 일이란 걸 알아챘음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나의 성장 과정은 전라도 사람이 전라도 아닌 고장에서 사는 방법을 체득하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게 뒤집힌 건, 스무 살 무렵이다.

머리는 텅 비고, 반항기만 가득했던 내게 반역으로 점철한 전라도의 근현대사가 갑자기 다가왔다. 머리통을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로 채워가며 나는 난생 처음 겪는 지적 체험에 감격했다. 내 어린 시절 눈에 담았던 그 산과 벌판, 그리고 내가 걷던 길들이 그대로 동학군의 땀과 피가 서린 곳이었다니, 와. 그 뒤로 나는 전라도 사람임을 자랑하게 되었다. 묻지 않아도 내가 전라도 사람임을 밝혔고, 특히 전라도 출신을 꺼릴 법한 상대나 자리라면 반드시 내 고향을 밝혀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려하곤 했던 것이다.

'피해 지역'의 지역 감정도 좀더 엄격하게 조절되어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은 건 최근이다. 시사잡지 기자인 B는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 대뜸 내 글 칭찬을 했다. 문장을 인용까지 해가며 하는 소리라 빈말은 아니었지만, 사람들도 많고 해서 점잔빼고 앉았다가 대신 고향을 물었다. 말씨로 보아 전라도 사람이 분명했기에 그걸 확인해서 우호감을 나누려는 수작이었다. "몰라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B는 정색을 하며 대답을 거부했다. 한참 후 다른 곳으로 술자리를 옭긴 후에야 나는 아까 일을 물었다. B는 대답했다. "짐작대로 나는 광주가 집이고 얼마 전엔 5.18 보상금도 받았다. 하지만 전라도 사람끼리 배타적으로 뭉치고 하는 건 딱 질색이다."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이 나라의 지역 문제는 일단 수면 아래로 내려앉은 듯 싶지만, 그럴수록 이 나라가 단일 민족인 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고향 좀 다른 것 가지고도 이렇게 못 잡아먹어 난리인 사람들이 인종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몇 년 전 르완다에선 인종청소로 100만이 죽었고 오늘 유고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아니할 말로 이 나라가 여러 인종이었다면 진작에 수백만은 죽어나가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전라도 문제는 빼고라도, 연변 동포에게, 굶주리는 북한 인민에게 한국인들이 보이는 야비함을 보라.

어릴 적 대구에서의 '희한한 칭찬'을 아버지에게 꺼낸 건 서른 무렵이다. 아버지는 웃으며 당신의 '희한한 칭찬'을 들려주었다. 매우 정열적이었던 증조 할아버지는 만주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식솔들을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살았다. 동네사람들(일본인들)은 아버지 가족을 가리켜 말하곤 했다. "김상 네는 조센징 같지 않아." 해방되던 해 아버지 가족은 연락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해가 바뀌도록 급우들(한국인들)로부터 매를 맞아야 했다. 급우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하곤 했다. "죽어라, 쪽발이 새끼." | 씨네21 1999년_4월
1999/04/20 16:30 1999/04/2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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