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5/15 23:47
오랜 만에, 강연회에 갔다. 원고나 강연 청탁에 간간히 응하기로 마음먹고 첫 강연이다. 나와 이영희, 최장집, 하종강 같은 이들이 돌아가며 한다는데 내가 맡은 주제는 “민주화와 언론운동”이었다. 나는 80년대 민주화운동은 절차적 민주화운동과 근본적인 민주화운동이 있었는데 앞의 것만 이루어졌다는 이야기, 언론운동을 제도언론 중심으로만 보는 건 잘못이며 실제 민주화운동에서 언론 역할을 한 것도 팜플렛, 전단, 소식지, 회보 같은 언론 취급도 못 받는 비제도 매체였다는 이야기, 들을 했다.

이야기를 한 시간 쯤 하고 질의응답을 두 시간 했다. 새내기들도 많고 해서 신선하게 느껴지는 질문이 많았다. (나이가 들고 아는 게 많아질수록 질문은 ‘짧은 강연’이 된다.) 간간히 싱거운 소리들도 해가면서 활기 있는 분위기였다. 맨 마지막에 한 여학생이 질문했다. “얼마 전에 남자선배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선배가 ‘노동해방이 되면 여성해방도 된다’고 말했거든요. 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계급의식이 투철한 분인데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선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요.” 강의실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저는 주류 여성주의의 어떤 편향을 비판한 것인데 여성주의 전체를 비난했다는 오해를 받는 건 저로서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내용보다는 말하는 태도와 방식의 문제라는 생각도 하고... 하여튼 오해를 나은 게 저이니 제가 풀어야 할 문제겠지요. 그건 그렇고...” 나는 말을 이었다.

“저는 노동해방이 된다고 해서 여성해방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억압은 계급 문제로 치환할 수 없는 소수자 문제입니다. 초기 맑스주의에 여성 문제가 빠져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건 그 시대의 한계였습니다. 맑스주의는 여전히 계급 문제를 기반으로 하지만 여성 문제를 비롯해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소수자 문제들, 사회 변화에 따라 새롭게 발견되는 억압들을 자기 요소로 받아들이면서 발전합니다. 오늘 시점에서 맑스주의자가 여성 문제를 배제하는 건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맑스주의자는 당연히 여성주의자이기도 합니다.”

강의실을 빠져나가던 한 여학생이 목례하며 말했다. “저도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 알았어요.” 몹시 안도하는 얼굴이다. 말없이 웃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아까 ‘여성100인위’ 이야기 하시려다 말았는데...” 나는 돌아가야 했으므로 그의 이메일 주소를 받았다. 그날 밤 편지를 썼다.

“몇 년 전만 해도 좌파 진영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피해자 여성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조직 보위’를 이유로 말이죠. 여성 100인위는 그래서 생겼는데 정확한 이름은 ‘진보진영 내 성폭력 근절을 위한 100인위원회’지요. 100인위는 실명공개라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비판도 많았죠. 실제로 명단에 오른 남성 가운데는 애매한 경우도 있었고, 그래서 ‘의도는 존중하지만 방법상의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저는 100인위를 처음부터 지지했습니다. 저도 방법상의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100인위 활동을 가로막는 빌미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100인위가 그 본래 의미 말고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바로 좌파가 ‘왜 좌파인지’ 성찰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억압과 싸우는 사람에게 성찰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억압과 싸우는 사람에게 성찰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그 말이 계속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다. (계속)
2004/05/15 23:47 2004/05/15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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