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19 23:34

문래역 근처 골목의 허름한 건물 한 층은 언제나 밤늦도록 불이 환하다. 지난 10년 동안 비정규직 노동 문제에서 가장 활발하고 의미있는 활동을 해온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무실이다. 1998년 정리해고와 파견법이 도입되면서 본격화한 비정규직 노동 문제는 이제 가장 보편적인 노동문제이자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대다수의 삶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여전히 특정한 사람들의 문제로 여겨지며, 그 문제를 둘러싼 자본과 정부의 거짓과 기만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한다. 김혜진과 동료들은 밤낮없이 바쁘다.


김규항 = 비정규 노동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김혜진 = 노동운동을 한 지는 20년쯤 되었는데 원래부터 대공장 쪽보다는 변두리 쪽의 중소 영세사업장에 관심이 있었다. IMF(외환위기)가 터져 굉장히 많은 중소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비정규 운동에 집중하게 되었다.
 
김규항 =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죽어간 게 박정희 군사독재가 한창이던 1970년인데, 정리해고와 파견제법이 생기면서 법에 의해 비정규 노동자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게 된 건 민주화 정권인 김대중 정권에서였다. 노동자들에게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 셈이다.
 
김혜진 = 그런 점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이라고 하는 특정한 고용 형태를 가진 노동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노동권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임을 되새기고 싶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확대되면 정규직 노동자들도 그만큼 고용에 대한 불안감으로 기업의 통제에 순응하게 되고 노동권 전반이 하락하는 결과를 낳는다. 비정규직은 특정한 사회적 약자의 문제도 아니다. 이미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고 연구직이나 대학의 비정규 교수들 같은 엘리트라고 하는 곳에서부터 청소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다양하게 퍼져 있는 고용 형태다.

김규항 = 지배계급은 언제나 피지배계급을 분리해서 지배하려 한다. 서로 위계를 만들고 반목하게 만들면 지배하기가 손쉬워지기 때문이다. 군사독재 세력이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 차별을 통해 인민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분리지배해온 역사가 있다. 비정규직은 자본독재시대의 분리지배 전략인 셈인데.
 
김혜진 =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뿐 아니라 비정규직 내부에서도 분리가 심하다. 직무별로 워낙 고용 형태가 다양하고 임금체계가 다르니까 이 직무의 노동자와 저 직무의 노동자가 마치 서로 완전하게 다른 노동자인 것처럼 여겨지는 구조다. 단시간 노동자도 있고 용역도 있고 파견도 있고 호출도 있고 기간제도 있고, 그런 식으로 비정규직을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노동자들을 최대한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김규항 = 정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제다. 대공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을 이야기하자면 대공장 비정규직보다 더 힘든 조건에 놓여 있는 2차 하청, 3차 하청 비정규 노동자들은 배제되기도 하고.
 
김혜진 = 그래서 우리의 고민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뿐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이 공동의 가치를 가지고 공동의 적과 투쟁하는 데 있다. 혼자 살아남으려다 함께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니라 함께 우리의 권리를 찾는 것. 법에 규정되어 있다 아니다, 누가 누가 차별받고 있다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권리, 노동하는 자들의 보편적 권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조직해야 한다.
 
김규항 =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노동자들이 갈기갈기 찢어져 제 앞가림에 매달리는 상황에선 지나친 원칙론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김혜진 = ‘밑에서부터 조직하여 발언하게 한다’는 우리의 전략은 사실 어려움이 많다. 정규직에 동정과 시혜를 기대하는 방향으로 했으면 오히려 훨씬 더 분위기 좋게 잘 만들어졌을 무언가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조직하고 투쟁함으로써 대립과 갈등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대립과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부딪치며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
 
김규항 = 그런 대립과 갈등이 분리지배의 결과라는 점에서도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어려움이다. 막막해 보이지만 이미 그런 어려움을 넘어선 사례도 종종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기 잔업 특근 포기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한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사례라든가.

김혜진 = 그렇게 된 원인을 분석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투쟁에 대한 대의가 살아있다는 점이었다. 대의원들은 그간의 활동에서 노동자들의 깊은 신뢰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인상적이었던 건 ‘이렇게 하면 우리 임금이 올라간다’ ‘이렇게 하면 뭐가 더 좋아진다’를 넘어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함께 산다’고 지속적으로 말해온 것이었다.
 
김규항 = 대의가 살아있다는 건 우리가 인간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김혜진 = 정규직 노동자들에겐 두 가지 마음이 있다. 하나는 불안하니까 비정규직을 안전판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고, 또 하나는 인간이 이렇게 살면 안된다, 함께 살아야 된다는 마음이다. 우리의 운동은 그 두 마음 사이에서 출발한다. 더 잘 먹고 잘살아야 된다, 임금과 노동 조건이 좋아야 된다는 좁은 방식으로만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활동해왔다면 그런 순간에 노동자들을 제대로 조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다른 현실이 가능하다는 것, 우리가 함께 살 수 있고 변화할 수 있고 희망이 있고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김규항 = 노동운동을 넘어 인간의 모든 해방투쟁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게 단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존중을 얻는 것, 연대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 그런 점에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도 마찬가지 아닌가.
 
김혜진 = 항상 놀라는 게 그거다. 내 경우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왜 투쟁하게 되었는지 꼭 물어본다. 열악한 상황에 있으니 필시 임금과 노동 조건 때문일 거라 생각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존심이 상해서이거나 정말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아서가 대부분이다. 투쟁이라는 게 인간으로서의 내 삶에 대한 고민, 이제는 굴종하지 않겠다는 자기 표현인 것이다. 임금과 노동 조건보다 더 중요한 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는 인간다움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이다.
 
김규항 =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동정과 시혜의 관점 역시 넘어서야 할 벽이다.
 
김혜진 = 홍익대 청소노동자들 싸움 때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굉장히 많은 사람이 연대했는데 극단적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의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시혜적 마음이 병존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투쟁쯤 되면 그런 시혜의 마음이 작동하기보다는 불편한 마음으로 반전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귀족 노동자가 되려 한다는 식으로.
 
김규항 = 시혜적 마음은 그 자체론 아름다운 것이지만 나와 현격한 거리가 있는, 내가 동정심을 베풀 수 있는 불쌍한 대상에 한정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김혜진 = 지금 같은 극단적인 경쟁사회에서 현대자동차 정규직이 된다는 건 신분 상승이다. 이 사람들이 그 투쟁을 통해 나보다 훨씬 더 높은 신분에 간다는 건 어떤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연대를 사회적으로 요청할 때 ‘이 사람들이 이렇게 처절하게 투쟁하니까 도와주세요’ ‘이 사람들이 이렇게 어려우니까 도와주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게 당장의 효과는 있다 해도 지양해야 한다.

김규항 = 재능교육 노동자들이 참 존경스럽다. 자신들만 생각했다면 이미 몇 번의 타결 기회가 있었지만 특수고용 노동자 전체의 대의에 입각해서 전원 복직을 내걸고 1500일째 비타협적으로 거리에서 싸우고 있다. 가장 곤란한 처지에 있지만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기품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김혜진 = 하루이틀 보는 일이 아닌데도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된다. 비정규직은 법으로 노동권이 부정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길 가능성이 없다. 그런데 싸운다. 왜 싸우는가, 이게 옳으니까 싸운다는 거다. 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니까 싸운다는 거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7년 싸웠다. 많은 사람이 7년 싸워서 이기면 도대체 누가 싸우려 하겠냐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겐 이기고 지고를 넘어 싸우는 행위 자체가 주는 의미가 있었다. 법적으로도 질 수밖에 없고, 제도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자본과의 관계에서도 힘이 없지만 내가 옳으니까 싸운다면서 버티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김규항 = 사회운동에서 현실성을 갖는 건 매우 중요하지만 현실성이 운동의 전부가 되어버리면, 대의에 입각한 비현실적인 투쟁이 아예 사라져버리면 운동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운동이 무너지면 현실이 무너지게 된다. 우리 사회에 희망을 심어준 사람들은 지난 10여년 동안 소외와 몰이해 속에서 자본의 공세에 맞서 싸워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김혜진 = 그런 사실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이해되고 있지 않는 데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요청해서 정보나 자료를 주면 ‘이 분들 임금이 이렇게 높아요?’ ‘좀 더 임금 낮은 분들 없어요?’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뭔가 자극적이고 극단에 있는 사람들, 머리를 조아리는 불쌍한 사람들을 기삿거리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다보니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이해가 낮아져서 ‘무기계약직’처럼 가장 첨단의 비정규 노동 형태가 정부나 자본의 선전 그대로 아름다운 정규직화의 사례로 기사화되기도 한다.

김규항 = 조·중·동이 아니라면, 경향이나 한겨레라면 노력이 필요하다. 고만고만한 정치인들의 동정은 현미경처럼 다루면서 시민들의 보편적인 삶을 좌우하는 문제에 그런 식이라면 말이 되는가. 물론 비정규직 문제가 워낙 복잡하긴 하다. 비정규직은 기간제, 간접고용, 특수고용으로 나뉘지만 그런 모든 게 노동자들을 더욱 무력하게 만들려는 자본의 전략이다 보니 계속 세분화하고 시시각각 더 특수한 경우가 만들어진다. 주류사회의 최고 전문역량이 총동원되는 것인데 그에 대응하는 활동이 쉬운 일은 아니지 싶다.

김혜진 = 비정규직 문제가 김대중 정권 이래 정부가 직접 통제에 나서다 보니 단순한 노사관계가 아니라 온갖 법률적 문제로 전환되어 버렸다. 상근을 시작한 활동가들이 처음 1년 정도는 관련 용어들을 파악하는 것도 힘들어할 정도다. 대응이 쉽지 않고, 불안정노동철폐연대는 법률위원회와 정책위원회를 두고 있다. 법률위원회는 매달 워크숍을 연다. 변호사들, 노무사들, 노동법학자들, 활동가들이 모여서 판례를 검토하고 비정규직법과 관련한 주요 쟁점도 검토하는데 이번에 100차 워크숍을 연다.
 
김규항 = 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파견철폐공대위로 시작해서 출범한 지 10년이 되었다. 특별한 계획이 있는가.
 
김혜진 = 가을에 비정규노동자 정치대회를 열려고 한다. 정치대회라면 대선 관련인가 오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진짜 정치대회를 하려는 것이다. 투쟁하는 비정규 노동자들과 비정규 노동자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돌아가며 발언도 하고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과제들을 놓고 함께 이야기도 하는, 지난 1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10년을 생각하는 자리를 마련하려 한다.
 
김규항 = 양대 선거도 있고, 그 방향이나 내용이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 어쨌거나 대중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 뜨겁다. 현장 분위기는 어떤가.
 
김혜진 = 진짜 사람들이 극단에 와 있구나 하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중소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실태 조사 같은 걸 해보면 전에 없이 적극적이다. 활동가들도 힘을 많이 받는다.
 
김규항 =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사람은 극단적 상황이 되면 오히려 변화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거나 스스로 왜곡되는 경우도 많은데.
 
김혜진 =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이명박의 공이 아닌가 싶다. 이명박을 욕하고 거부하는 분위기가 거대한 벽이나 권력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노동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면이 있다. 물론 그런 에너지가 단지 이 정권이 저 정권으로 바뀌는 차원으로 왜곡되어 드러나고 있어서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에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진 것 같은 국면이 열리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열망과 정말로 변화가 될까 하는 고민이 활발하게 부딪치고 있다는 건 희망이 아닐까. 앞으로의 10년이 중요하다. (경향신문)

 

2012/01/19 23:34 2012/01/1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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