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0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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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시인 송경동씨가 최근 펴낸 산문집 말미엔 김진숙씨가 크레인에서 내려오던 날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묵묵히 일한 활동가들이 아니라 정치인과 유명인들을 비추는 풍경이 적혀 있다. 제도정치가 아니라 운동정치가 사회변화를 주도해온 한국 사회에는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참 많다. 그들이 바로 지배체제의 폭압으로부터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버텨낸다. 이종회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는 지난 35년 동안 활동가로 살아왔다.


김규항=2008년 미국발 공황 이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물결이 거세다.

이종회=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운동은 1999년 WTO(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를 저지한 ‘시애틀 전투’와 이라크 전쟁 반전 투쟁이 물려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한풀 꺾이는 모습이었다. 2008년 공황으로 다양한 흐름들이 생겨나고 있다. 유럽에서 노동자의 임금을 인하하고 연금과 같은 복지를 삭감하려는 정책에 반대하는 급진주의적인 흐름이 살아나고, 아랍에서도 민주주의와 생존권을 요구하는 저항이 거세고, 미국의 월가 싸움이 있고.

김규항=미국에서의 반자본주의 구호는 고목나무에 핀 꽃처럼 보인다. 미국의 좌파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비판적 지지’와 ‘선거연합’을 통해 대부분 민주당으로 흡수되어 버린 상태 아닌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둘러싸고 우리에게도 그런 변화의 자극이 있는 것 같다.

이종회=미국의 변화는 그만큼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자본 운동의 국제무역과 관련해 본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서 시작해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가 합의되면서 WTO 체제로 가는데, 이게 참가국가(153개국) 만장일치 체제라 합의가 어려워지면서 FTA가 힘을 얻기 시작한다. WTO나 FTA에서 일반 공산품은 핵심이 아니다. 일상적인 식량, 서비스 부문, 즉 공공정책, 복지, 의료, 교육, 교통, 통신 등에다 지적재산권 같은 것들에 대한 교역, 즉 수탈이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김규항=삼성이 한·미 FTA의 기획자 노릇을 하고 의료민영화 계획에 투자해온 것도 바로 그런 맥락인 셈이다. 한·미 FTA는 보수가 아니라 자유주의 세력이 기틀을 만들고 주도해왔는데.

이종회=김대중이 ASEAN(동남아국가연합)+3으로 갔다면 노무현은 미국과의 FTA를 중심으로 동시다발적인 FTA로 가면서 자본의 진로를 열어주었다. 한편 시민운동은 주주자본주의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그런 흐름을 지원했다.

김규항=그럼에도 그들은 진보세력으로 미화되곤 한다. 그들은 이명박과 적대적이지만 이명박의 가장 큰 수혜자다.

이종회=이명박이 나쁜 놈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이명박 경제정책이 노무현과 다른 건 하나도 없다. 4대강 이야기하지만 노무현은 새만금, 부안 핵폐기장을 마무리했다. 제주도 해군기지도 용산도 노무현이 시작했다. 이명박이 폭압적이라고 하지만 노무현은 평택 대추리에 군대를 투입했고 한·미 FTA 반대 시위를 하는 농민 두 분이 사망할 만큼 저항에 관한 한 폭압적이었다. 연금·복지와 관련된 체계를 시장화한 것도 유시민이었고 자본시장 통합법도 노무현이 만들어서 이명박에게 선물한 거다. 분명한 차이라면 북한과의 관계일 텐데 그것도 양면이 있다. 남한은 한·미 FTA에서 개성공단 생산 상품에 ‘Made in Korea’를 붙이고 싶어 한다. 햇볕정책은 평화를 내걸고 있지만 북한을 남한 자본시장에 하위 배치하는 데만 중심을 둔다면 문제다.

김규항=그런 맥락에서 이명박 정권은 더 열심히 햇볕정책을 해야 하는데 워낙 막돼먹은 극우 습성 때문에 북한과 틀어져버렸다. 자본의 하수인이 자본 운동을 훼방하는 코미디랄까. 어쨌거나 김대중·노무현 같은 자유주의 정치세력이나 이명박 같은 보수 정치세력이나 사회경제의 면에선 다를 바 없음을 들춰내기에 불편한 배경은 있는 것 같다. 워낙 극우 독재기간이 길고 수구라 불리는 그 잔재 세력이 엄존한다.

이종회=유럽 사람들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같은 전쟁이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공황을 극복하는 방법이었음을 어지간히 안다. 예를 들면 영국 BBC에서 공황 이후 여론 조사를 한 걸 보면 대안체제로 사회주의를 거론한 사람이 60%를 넘는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전쟁은 이념 전쟁이었다. 그 왜곡된 상처와 잔재가 우리에게 내면화·구조화되어서 내려오고 있고 국가보안법이라든지 억압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김규항=진보라는 사람들 상당수가 이명박 정권교체에 올인하는 모습은 결국 우리가 국가보안법에 반대한다면서 실은 국가보안법 체제에 스스로 사로잡혀 있음을 드러낸다.

이종회=2008년 공황 직후에 WTO 전 사무총장 파스칼 라미가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앞두고 ‘보호무역으로 가면 전쟁 난다’고 했다. 사실 공황은 자본 스스로 해결 방법이 없다. 결국은 사회주의를 얘기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지금의 경제적 고통을 넘어서고 전쟁의 참화를 막을 수 있다.

김규항=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과잉투자, 과잉축적 속성이 이윤율 저하를 부르고 결국 공황으로 터진다고 했는데 2008년 상황도 그대로다. 주류경제학은 공황 직전까지 예측조차 못하는 철저하게 무능한 모습을 보였는데 한국에선 주류경제학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만 꺼내면 매우 비현실적인 좌파 꼴통으로 치부된다.

이종회=반MB전선에서 ‘나꼼수’에 열광하고 문재인이나 안철수 대통령을 기대하는 대중들이 사회주의 쪽 이야기에 거부감을 갖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이해가 간다. 문제는 지식인, 학자들이다. 사회주의 이야기에 꼴통 좌파라는 식으로 대중들의 거부감을 부추기는 말만 할 게 아니라 사회주의가 아니면 어떤 대안이 있는지 진지한 논의를 해야 한다.

김규항=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청년 시절에 풍찬노숙하며 운동했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중산층으로 자리잡은 사람들이라 이명박 정권만 교체하면 정말 세상이 바뀌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장은 진지한 견해라기보다는 그런 욕망에 기초한 경우가 많다. 그런 몰지각한 사람들은 차치하고 장하준처럼 케인스주의의 복원이나 유럽식 복지사회를 고민하는 경우는 어떻게 보나.

이종회=지금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통화정책을 비롯해 케인스주의 정책을 다 써봐도 백약이 무효인 게 확인되고 있다. 복지 이야기는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 위력을 보인 무상급식이 씨앗이 되었는데 생존권의 또 다른 표현으로 제기된 게 정책처럼 되어버렸다. 복지는 분배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은 생산체계와 연계된 문제다. 현재 자본주의는 공공부문과 복지부문을 시장화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할 정도의 위기상황이어서 이를 없애가면서 형성된 신자유주의이고 그래서 유럽도 복지가 무너지고 있는 판인데 한국이 복지사회로 간다는 건 이치에 안 맞는 이야기다.

김규항=세계적으로 청년들의 저항이 거센 건 공황 이후 선진국에서도 30~40%에 이르는 실업률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높은 실업률은 노동운동의 연대나 투쟁력을 위축시키는 점도 있지 않은가. 우리의 경우 핵심은 역시 비정규 문제인데.

이종회=찰리 채플린 영화를 보면 공황 시대에 실업자들이 배급을 타려고 줄 서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이면엔 AFL-CIO(미국노동총연맹 산업별조합회의)를 체제내화시키려는 전략이 있었다. 한국 사회도 김대중이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관리체제를 근거로 정리해고와 파견제를 도입하고, 노무현이 비정규직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노동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리가 된다. 기존에 민주 노동운동의 구심이었던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 되거나 해고될까봐 잔뜩 겁을 먹게 되었다. 비정규직은 생존 자체에 매달려야 하고 학생들은 학생운동이고 뭐고 학교 들어가면 취업 준비에 매달리고.

김규항=근래 민주노총의 모습을 봐도 그렇고, 정규직 남성 대공장 노동자들이 구심이 되는 노동운동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이종회=계급운동이 새로 서는 노동운동, 불안정 노동자들의 정치적 조직화가 숙제다. 기존의 정규직은 생산 수단에 안정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형태라 군대적 편제에 따른 총파업 등의 정규전이었다면, 비정규직·실업을 포함한 불안정 노동의 조직 방식이나 투쟁 방식은 비정규전이고 게릴라전일 수밖에 없다. 그 정확한 형태와 방식은 좀 더 고민이 필요한 상태다. 촛불, 희망버스에 대한 성찰적 연구도 필요하고.

김규항=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일부가 유시민과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다. 여러 의견들이 있는데 진중권 같은 사람은 통합을 거부한 사람들을 ‘좌익소아병’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종회=노동자가 노동자의 삶을 대변하지 않는 자유주의 정치에 의존하지 않고 정치세력화하려고 만든 게 민주노동당이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반MB’라는 몰개념적 정치공학으로 그 오랜 노력이 물거품이 될 지경에 처해 있고 진보신당 정도가 그 깃발을 부여잡고 있다. 그런 안타까움에 낯선 사람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죽음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피눈물을 느끼지 못하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 아닐까.

김규항=선생은 진보신당보다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인데 이념적 지향으로서 사회주의인가, 현실적 대안으로서 사회주의인가.

이종회=둘 다이고 현실적으로는 후자다. 2008년 공황은 자본주의의 일시적 위기가 아니라 바닥을 드러낸 사건이다. 대안도 해결책도 없이 환율정책, FTA와 같은 특정한 지역의 극단적인 시장확장 정책 등으로 파산 위기에 몰린 거대기업들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들만 난무하면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1%의 부자들은 오히려 더 부자가 되고 청년실업, 정리해고, 비정규직이 상시적인 형태가 되었다. 이윤을 위한 무차별한 생태계의 파괴로 후세의 생존까지 위협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 아랍 등지에서 99%가 거리에 나서게 되고 ‘고장난 자본주의’ ‘자본주의 이제 그만’ ‘문제는 자본주의다’라고 하는 구호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자본은 1, 2차 세계대전이 그랬듯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도 높다. 인류와 지구의 위기 속에서 사회주의는 매우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기된다.

김규항=‘닥치고 정권 교체’에 대한 이의 제기가 오히려 노동자와 서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교조적 이상만 좇는 행위라 여겨진다. 한국 사회는 마치 최면에라도 빠진 듯하다.

이종회=신자유주의적인 자본축적 전략의 폐기 없는 대안, 그리고 이미 시효가 지난 케인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대안은 단지 집권을 위한 술수일 뿐이다. 정권이 바뀌면 정치적 보수주의는 개선되겠지만 사회경제적 변화는 없을 것이고 모순이 깊어지면서 노동자와 서민의 고통은 더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규항=국가보안법 이야기도 했지만 사회주의를 말하자면 역시 현실 사회주의의 상처가 큰 벽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사회주의였다고 생각하나.

이종회=냉정하게 말해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문제는 현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경쟁하면서 스스로 사회주의의 이상으로부터 멀어져 간 것이다. 생산력을 모든 것의 우위에 두고 인민 대중을 그 동원 체계로 배치하는 억압적 관료체제가 되면서 사회주의적 가치관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김규항=‘자유로운 생산자연합’이라는 사회주의의 본색은 현실 사회주의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대한 오해나 오용도 심각한데.

이종회=현실 사회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당 관료들의 독재로 왜곡되었고 오늘 대개 그렇게들 알고 있지만 실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개념이다. 자본주의의 잔재를 척결하고 자유로운 생산자연합을 건설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전면화인 것이다. 토론을 통하여 의견을 모아나가는 과정은 사실 효율성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인내심과 존중심을 필요로 하는 그런 지난한 과정이야말로 노동자 민주주의다.

김규항=1980년대엔 청년 사회주의자들이 많았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민주화가 되면서 대부분 체제 안으로 들어갔는데 선생은 오히려 사회진보연대, 비정규직 철폐연대, 진보넷, 참세상 등을 꾸리며 운동진영의 살림꾼으로 살아왔다. 떠나지 않은 비결은.

이종회=지키고 싶은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존재조건이 가치를 규정하는 속성이 있다. 대중성을 위해서, 현실성을 위해서, 여러 명분과 핑계들이 있지만 떠나면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가치를 재구성하게 된다. 그걸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김규항=그 가치는 뭔가.

이종회=없는 자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의리. 사회주의자는 눈물이 많다고 했던가. 35년 동안 수많은 동료들이 떠나갔고 배신감도 들었지만 후회는 없다. 경제적 문제라든가 불편한 점이 있지만 그 가치를 포기했다면 나는 불편해진 게 아니라 불행해졌을 것이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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