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17 14:28

진중권 씨가 자신보다 급진적인 좌파의 존재 가치를 부인하면서 드는 가장 큰 이유는 대략 두 가지다. 낡고 비현실적이라는 것. ‘지금은 디지털 시대인데 한국의 좌파들은 농경 시대나 중공업 시대의 사고를 고수한다’ ‘존재하지도 않는 노동자 계급과 이미 폐기처분된 사회주의를 버리지 않는다’ 진중권 씨가 기회만 되면 반복하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한국의 좌파들이 낡고 비현실적인 경향을 갖는다는 데 일부 동의한다. 그러나 낡고 비현실적인 것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매우 경박한 것이다. 낡고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을 극복하는 힘과 가치가 들어있는 것도 있고 더할나위없이 세련되고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더욱 미궁으로 빠트리는 것도 있다.

오늘 자본주의 사회가 농경 사회도 중공업 사회도 아닌 디지털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이야기는 누구도 굳이 부인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나 역시도 이메일과 구글톡을 가장 주요한 소통 수단으로 삼고 있고 강연 등으로 늘 전국을 돌지만 어딜 가든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상시 접속한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마치 SF영화에 들어와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디지털 시대를 형유하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시장에서 생존하기엔 약점이 너무 많은 고래가그랬어의 발행인이기에 그런 디지털 도구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부리면서 그런 약점들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우리 삶의 이런 변화가 짐승과 다름없이 살던 인간이 불을 발견하고 도구를 사용하게 되는 변화처럼 인류 문명의 정상적인 발전의 산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렇게 세상이 뒤집혔다고 말할 정도로 디지털화하여 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본의 경쟁의 결과다. 그 경쟁의 결과로 자본은 점점 더 인간의 삶과 행복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는 첨단 상품들을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고, 그걸 구매하지 못하면 뒤쳐지고 가난한 것처럼 느껴지도록 선전하면서 무한경쟁 무한증식 하는 게 디지털 시대인 것이다. 디지털화가 가속되고 있다는 건 자본의 무한경쟁과 무한증식이 더욱 가속화, 거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자본의 무한경쟁과 무한증식을 위해 만들어진 그런 상품들을 거부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회 체제 안에서 회사를 다니고 월급을 받아 사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런 운동을 실천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대개의 우리가 디지털 사회에서 현명함을 잃지 않는 방법은 그런 디지털 문명의 장점들을 자본의 체제에 반하는 활동과 좀더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생산에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가치들이 자본에 독점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디지털 시대’니 뭐니 따위 자본이 대중을 현혹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을 되도록 ‘사용해주지’ 않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라는 구호가 가진 가장 사악한 측면은 마치 디지털 세상엔 종래의 계급적 억압이나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자신이 한국의 거의 유일한 디지털 시대의 좌파임을 자임하는 진중권 씨는 ‘노동자 계급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야말로 그랬으면 정말 좋겠지만 정말 오늘 현실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가? 정말이지 참새 껌씹는 소리다. 이를테면 양극화가 심각하다, 라는 말은 박근혜 씨도 하는데 그 말은 곧 ‘계급적 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양극화라는 말은 누구나 하면서도 계급이라는 말을 하면 이 사람은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군, 80년대 스타일이군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디지털 시대를 향유하고 있다는 환각 속에서 자본의 부속품으로 전락해간다. 무서운 대중조작이다.

물론 70년대나 80년대의 노동자 계급이라는 개념을 오늘 그대로 적용시키긴 어려운 부분이 있다. 노동의 형태도 산업의 구조도 많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자본의 정규와 비정규 분리지배 전략도 고전적인인 의미에서 노동자계급을 말하기가 어렵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계급이 사라져버렸거나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라는 자본주의의 뼈대 자체가 달라진 건 아니다. 쉽게 말해서 디지털 시대엔 계급이 사라진 게 아니라 계급의 양상이 변화한 것이며 자본의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게 아니라 억압과 착취의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좌파에게 중요한 건 농경시대인가 중공업 시대인가 디지털 시대인가가 아니라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는가, 소외된 노동이 존재하는가, 이다. 농경시대든 중공업 시대든 디지털 시대든 디지털 할애비 시대든 계급적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는 한 좌파의 임무는 그것과 싸우며 그런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가장 세련된 좌파는 ‘디지털 시대엔 계급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계급적 억압과 착취의 양상을 꿰뚫어보며 그것에 현혹되지 않고 싸우는 사람이다.

'디지털 시대'의 진실은 삼성전자 광고판에 적힌 ‘디지털 노마드’라는 구호와, '디지털의 꽃'을 생산하는 먼지 하나 허용되지 않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가면서도 산재 판정조차 받지 못한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피눈물의 대비 속에, 들어있다. (계속)

2010/08/17 14:28 2010/08/17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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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디자인된 수구꼴통: 이 모양입니다.

    Tracked from 아무튼지간에 2010/08/17 20:08  삭제

    1. http://tl.gd/282ao2 "서울시에서 구둣방 지금처럼 다 교체해 주고 나서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고, 공간은 예전보다 더 좁아졌어요. 문을 닫으면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안보이고. 이왕?

  2. Subject: 진겔루스 노부스의 '베냐민'적 무식함!

    Tracked from 지연효과 (After-Effect) 2010/08/18 12:16  삭제

    아마 한겨레에서 김규항 씨와 진중권 씨가 설전을 벌였나보다. 김규항 씨가 진중권 교수를 진보신당 당적을 가지고 있는 자유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진중권 교수가 김규항 씨를 좌파바바리맨으?

  3. Subject: 중권 유감

    Tracked from 지연효과 (After-Effect) 2010/08/18 12:16  삭제

    유럽에서만 생활하신 분들은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 또는 심지어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미국에서는 자유주의이다. 어쨌든 다음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의 사회민?

  4. Subject: Working Class Hero를 기다리며

    Tracked from 오선지위의 딱정벌레 2010/08/18 13:22  삭제

    논쟁은 재미있다. 세상에서 제일 (제일까지는 아니더라도 흥미롭다) 재미있는 것이 불구경, 싸움구경이라고 했지만 사이버논쟁은 더 재미있고 흥미롭다. 얼마전 김규항과 진중권의 논쟁이 벌?

  5. Subject: Twitter Trackbacks

    Tracked from 2010/08/18 15:26  삭제

  6. Subject: Camasi Slim Barbati

    Tracked from Camasi Slim Barbati 2014/09/26 23:43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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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Subject: Imbracaminte Ief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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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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