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14 14:36

요즘 몇 해 전 이맘때 한 고등학생에게서 받은 편지가 자주 떠오른다. 중학생 때부터 내 글을 읽었다는 그는 아버지가 진보진영에서 활동하는 잘 알려진 교수라고 했다. 그는 특별한 아버지를 둔 덕에 자라면서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에 시달리지도 않았고 사회와 역사를 보는 나름의 안목을 가질 수 있었고 삭막한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숲이 가까운 교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아이들은 자연과 함께 자라야 한다는 아버지의 생각 때문이었다고 했다. 중학생이 되어 아버지의 사회 활동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면서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고 얼마 안 된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적이 무거운 얼굴로 그러더란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대학입시 준비를 본격적으로 해야지. 엄마하고 의논했는데 아무래도 이 동네에선 어려울 것 같아서 강남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그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교육문제에 그런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지만 제 아버지가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그는 대부분 ‘인 서울’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없는 친구들을 두고 혼자 강남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살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 했다. “아버지는 저를 위해 그러셨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느낍니다.”
그는 나에게도 두 아이가 있는 걸로 안다며 대학은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었다. 난감했다. 나는 아이들과 이미 대학엔 꼭 가지 않아도 좋다는 합의를 한 바 있긴 하지만, 그걸 밝히자니 ‘나는 네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야’라고 유세하는 꼴 아닌가. 나는 그의 아버지가 이중적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도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고서야 그런 선택을 했다면 진보진영의 근래 형편으로 보건대 오히려 ‘최후까지 버틴’ 편이라 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런 선택을 하게 된 ‘현실적인’ 이유 또한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제아무리 대단한 것이라 해도 아이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한순간에 부수어도 좋을 만큼 대단한 것일까? 내가 알기론 인간의 삶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아버지는 아이가 스펙을 쌓아 자본의 시장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리길 기대하는 게 아니라 진보적 엘리트로 성장하여 자신처럼 사회에 기여하길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어떤 삶의 방식을 좇는 건 그 삶이 옳아서 뿐만은 아니다. 그런 삶이 멋지게 느껴지고 존경심이 들 때 비로소 그 삶을 좇게 된다. 그런데 그는 이제 아버지를 비롯한 진보 지식인들의 말을 ‘입으로만 저러지’ 냉소부터 하게 되어버렸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는가. 아니 할 말로, 차라리 그 아버지가 막돼먹은  극우 꼴통이었다면 그는 반항심에서라도 힘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몇 번을 고쳐가며 힘들게 답장을 썼다. “무엇보다 나 또한 한 아버지로서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다는 말이 참 아프네요. 그러나 그보다 더 슬픈 일은 님이 이 일을 통해 고작 아버지를 비롯한 진보 지식인들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만 얻게 되는 걸 거예요. 나는 이 일이 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지배하는 시스템, 즉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대체 얼마나 강력한 것이기에 아버지 같은 분도 흔들리는 걸까, 질문하는 계기가 되길 더 깊이 공부하는 계기가 되길 바래요. 괴물이 강력한 만큼 괴물의 정체를 밝히고 그 괴물을 넘어서는 행로 또한 길겠죠. 그 긴 행로에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도 회복되길 기도할게요.” (한겨레)

2010/04/14 14:36 2010/04/14 14:36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1895

  1. Subject: 두려움을 벗으면 교육이 보인다

    Tracked from 위즈의 세상살이 2010/04/14 20:33  삭제

    한국에서 돈 있는 이들은 자식을 유학을 보내고, 조금 있는 이들은 이사를 해서 좋은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모인 학교에 다니게 하고, 평범한 부모들은 애써서 학원과 과외비용을 지원하고, 돈?

  2. Subject: 서울비의 알림

    Tracked from seoulrain's me2DAY 2010/04/16 10:11  삭제

    “괴물이 대체 얼마나 강력한 것이기에 아버지 같은 분도 흔들리는 걸까 …괴물이 강력한 만큼 괴물의 정체를 밝히고 그 괴물을 넘어서는 행로 또한 길겠죠. 그 긴 행로에서 아버지에 대한 존?

  3. Subject: '위선' 혹은 위선자에 대한 단상

    Tracked from phlip의 홈페이지 2010/04/17 13:27  삭제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강해지는 생각, 위선자가 결국은 이기는 자,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위선'이라는 것이 갖는 힘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거다.잠깐,&nbsp

  4. Subject: 힘들게 쓴 답장 (규항넷)

    Tracked from Strawberry Swing 2010/04/20 13:03  삭제

    2010/04/14 14:36 힘들게 쓴 답장 요즘 몇 해 전 이맘때 한 고등학생에게서 받은 편지가 자주 떠오른다. 중학생 때부터 내 글을 읽었다는 그는 아버지가 진보진영에서 활동하는 잘 알려진 교수?

  5. Subject: 작은 일관성, 큰 일관성

    Tracked from 세상 끝에서의 만남 2010/05/30 22:11  삭제

    (공감 육아, '엄마가 안 된다고 할 거야'를 읽고.) 듣기에 좋은 단어는 아니지만, 아이가 자발적으로 보이지 않는 행동에 대한 모든 종류의 유도를 - 전혀 없을 수는 없는 이것을 - '통제'라고 부?

  6. Subject: nuvem.tk

    Tracked from nuvem.tk 2014/07/12 12:44  삭제

    GYUHANG.NET ::

  7. Subject: apprentissage sécurité informatique

    Tracked from apprentissage sécurité informatique 2014/07/17 16:33  삭제

    GYUHANG.NET ::

  8. Subject: weight loss pills for women that work

    Tracked from weight loss pills for women that work 2014/08/01 17:22  삭제

    GYUHANG.NET ::

  9. Subject: bouncy castle

    Tracked from bouncy castle 2014/09/19 10:57  삭제

    GYUHANG.NET ::

  10. Subject: Leadership Talent

    Tracked from Leadership Talent 2014/10/19 15:19  삭제

    GYUHANG.NET ::

  11. Subject: regarder des films en streaming

    Tracked from regarder des films en streaming 2014/10/23 05:25  삭제

    GYUHANG.NET ::

  12. Subject: regarder des films en streaming

    Tracked from regarder des films en streaming 2014/10/24 09:23  삭제

    GYUHANG.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