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3/04 16:04
80년대 운동을 흔히 ‘민주화운동’이라 말한다. 그러나 80년대에 민주화운동만 있었던 건 아니다. 80년대 운동엔 ‘민주화’를 넘어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이 주인인 세상을 만든다는 이상주의적 목표를 갖는 ‘변혁운동’이라는 더 큰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80년대 운동은 단지 ‘민주화운동’이라 불린다. 80년대 변혁운동의 성원들은 대개 그걸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제 청년기의 이상주의에 대한 자부가 없다.

80년대 변혁운동은 군사파시즘의 폭압에 맞서 급진화하느라 이론이 현실보다 턱없이 앞서가거나 관념이 실천을 지배하는 식의 편향도 적지 않았다. 정신없이 싸우던 시기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군사 파시즘이 물러나면서 그런 편향은 자연스레 드러났다. 변혁운동의 성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대체 내가 뭘 한 건가’하는 자괴심을 갖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그 자괴심은 다시 ‘이상주의에 대한 혐오’로 발전했다.

그들은 오늘 한국사회의 중심이다. 자신이 했던 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 말하는 그들은 ‘민주화운동의 후반작업으로서 개혁운동’을 주도해왔다. 그들은 지난 몇 해 동안 영원불멸할 것 같던 극우 파시즘의 잔재들을 맹렬히 몰아붙여 왔다. 그들의 그런 성취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강준만 씨가 주도한 초기 개혁운동에 열심히 협조하다, 언젠가부터‘개혁은 진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걸 일로 삼는 나 역시 그걸 부인하지 않는다.

초기 개혁운동은 외양은 초라했으나 좌파 입장에서도 존중할 만한 ‘변화의 가치’를 가졌다. 그러나 그 운동이 생각보다 빠르게 한국사회의 중심부에 접근하고 제 정권까지 만들어내면서 더욱 빠르게 ‘변화의 가치’를 잃어갔다. 이제 그들이 원래 보수적이던 사람들과 다른 건 자신이 보수적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 정도다.

그들의 보수화를 비판할 때 그들은 언제나 ‘현실적인 한계’를 말하곤 한다. “정치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며 여러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무현을 믿는다”는 말은 그들이 공유하는 주문(呪文)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라크 파병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한계로) 동의하며, 노동자 농민이 죽어나가는 정책들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한계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현실적인 한계’는 실은 ‘그들의 한계’일 뿐이다. 현실주의는 그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현실을 핑계로 원칙을 무시하는 ‘오만한 타협’이 아니다. 현실주의는 이상주의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는 ‘고통에 찬 노력’이다. 그래서 진정한 현실주의는 언제나 이상주의에 대한 존경에서 출발한다. 정치란 그들이 말하듯, ‘이상이 아닌 현실’이 아니라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그들의 현실주의가 처음부터 악의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들의 ‘이상주의에 대한 혐오’가 처음부터 그들이 갖는 ‘변화의 가치’를 한정한 건 사실이다. 그들이 한국사회에 이룬 일정한 사회적 성취를 부인하지 않지만, 그들은 한국 사회를 유례없이 이상주의를 혐오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이상주의에 대한 존경이 없는 사회, 이상주의를 혐오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청년들이 이라크 파병안에 “원래 국민은 반대하고 대통령은 찬성하고 하는 것”이라는 따위의 온갖 요사스런 행태나 일삼다 슬그머니 찬성표를 던지는 타락한 현실주의자를 ‘가장 개혁적인 정치인’으로 꼽는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는가. 갈수록 민주화하고 갈수록 개혁하는데도 정작 한국인들의 삶은 갈수록 고단하고 강팍해지기만 하는 건 괜한 게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조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상주의를 혐오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노동자의힘 기관지)
2004/03/04 16:04 2004/03/0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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