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2/18 23:26
오랜 만에 점심 먹으러 온 후배가 말했다. "이념은 이기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기득권 세력은 한나라당 지지하는 게 당연하고, 시민들은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 지지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상품을 구매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맞는 얘기야. 이기적어야 하지. 그런데 이기심의 사회적 가치가 다 같은 건 아니겠지. 지배 계급이 자기 이익을 보전하려는 건 사회적으로 정당하지 않지만, 노동자나 농민이 자신의 생존권을 찾으려는 건 이기적이면서도 사회적으로도 정당하지."

후배 말마따나 이념은 이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념이란 다름 아닌 '어떤 계급의 이해를 지지 하는가’다. 이를테면,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라는 책 제목은 그른 것이다. 좌우는 더도 덜도 아닌 ‘위아래’다. 지배 계급의 이해를 지지한다면(오늘 체제가 유지되길 바란다면) 보수(우파)이고, 피지배 계급의 이해를 지지한다면(오늘 체제가 바뀌길 바란다면) 진보(좌파)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시민’이라는 중간 계급의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개혁적 우파니 개량적 진보니 하는 다양한 이념들이 촘촘히 끼어 있다.

한국인들은 지난 3대에 걸쳐 ‘극단적인 형태의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지배 계급의 이념을 강요당해 왔다. 그걸 부인하는 건 죽여 마땅한 반역자였다. 그 결과 상위 계급은 제 이념에 뻔뻔스러울 만치 익숙해진 반면, 중간 계급과 하위 계급은 ‘남의 이념’에 오히려 더 익숙하게 되었다. 90년대 들어 중간계급은 이른바 ‘개혁운동’(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운동, 강준만이 주도한 정치개혁 언론개혁 운동, 노사모를 비롯한 이런저런 인터넷 시민운동..)을 통하여 제 이념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하위 계급, 즉 노동자 민중들은 여전히 남의 이념에 더 익숙한 상태다. 늘 열심히 노동하지만 사는 꼴은 형편없어, 세상이 확 뒤집어지지 않고서는 도무지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진보 정치가 진출하면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거"라 염려하고, “이라크 파병이 가져다 줄 국가적 실리”를 기대하는 슬픈 코미디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념적 혼란’은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다. 특히 90년대 이후 개혁적 우파가 ‘민주화의 공’을 독식하고 ‘오늘의 진보’를 자처하기 시작한 일은 좌파에게 가장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오늘 한국에서 ‘이념의 명찰’은 한 칸씩 왼쪽으로 붙어 있다. 극우는 보수의 명찰을, 개혁적 우파는 천연덕스럽게 진보의 명찰을 붙이고 있다. 붙일 명찰이 없는 좌파는 그저 ‘논외의 상태’다.

오늘 노동자 민중이 이리저리 손쉽게 내몰리는 것도 그들의 이념이 그런 정처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좌파의 가장 시급한 숙제는 '논외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며, 진보를 자처하는 개혁적 우파야말로 오늘 좌파의 가장 주요한 적이다. 성실하고 열정적인 현장 활동가들은 ‘동지들이 죽어나가는 판에 무슨 소린가’ 싶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 왜 좌파가 민주화가 된 지 10여년이 지나 고작 ‘동지들이 죽어나가는 판’을 맞게 되었는가를 되새겨야 한다.

좌파가 ‘가장 좌파적인 소재’에 집중하려 드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의 ‘이념적 혼란’에 대한 고려 없이 오로지 ‘가장 좌파적인 소재’에만 집중한다면 운동은 자족적인 게 되기 쉽다. 80년대 이후 늘 그래왔듯, 투쟁으로 얻어지는 사회적 성과는 모조리 개혁적 우파에게 내주고 운동의 현실적 한계는 좌파 본연의 한계라 치부되어 버리는 것이다. '논외의 상태'에 있는 운동이 사회를 위협할 방법은 없다. 그리고 사회를 위협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좌파가 아니다. 개혁에서 진보로! 오늘 한국 좌파의 숙제다.

(노동자의힘 기관지)
2004/02/18 23:26 2004/02/18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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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1/25 주제: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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