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16 11:58

몇 해 전, 홍익대 안상수 선생의 요청으로 그곳 시각디자인과 대학원생들에게 특강을 한 적이 있다. 디자인 전반에 관심은 있지만 강의를 할 만큼은 아니라, 그냥 내가 늘 하는 이야기를 했다. 이런 이야기. '한국사회가 민주화한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 갈수록 보통 사람들이 더 고단하고 미래가 암담하게만 느껴지는 희한한 상황은 민주화가 곧 자본화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화라고 부르는 자본의 전지구적 운동은 두 번에 걸쳐 있었는데 첫 번째가 1870년대에 시작된 제국주의 경쟁이고 두 번째는 그로부터 꼭 100년 후인 1970년대에 시작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시작할 무렵 한국은 군사 독재가 시장을 완전히 틀어쥐고 있어서 그 체제에 편입될 수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로선 한국의 자유로운 시장, 즉 민주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군사독재가 물러나고 민주화가 시작되면 어떻든 좋은 세상으로 나아갈 거라 믿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자본의 거대한 아가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자본화가 진행되고 자본의 가치관이 사람들에게 내면화하면서 한국은 어느새 사랑이나 존경마저 돈으로 구매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이 되었고, 디자이너의 예술적 재능과 감각 또한 매우 자연스럽게 자본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다. 디자이너는 결국 선택의 기로에 선 셈이다. 자본을 위한 봉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거스를 것인가. 다시 말해서 정신적 매매춘을 지속할 것인가 탈출할 것인가.'
부러 도식적이고 냉담하게 이야기한 이유는 한국의 디자이너들에게서 도무지 자의식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사회, 특히 오늘과 같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디자인이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동원되는 숙명 자체를 부인하거나 디자이너들이 그런 숙명을 완전히 거부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그런 숙명에 순응하는 자신을 불편해 할 줄은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디자이너들은 자본에 의해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는가를 디자이너로서의 성취의 잣대인 양 여기는 태도가 만연했다.
그런데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내 이야기에 동의하는 몇몇 학생들에게서 가슴 아픈 이메일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매매춘과 비유된다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내 이야기는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란 제 노동력을 팔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사회이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노동은 매매춘과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유독 자신의 문제로 연결짓는다는 건 그들이 순수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일에 대해 이따금씩 되새기며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이 꽤 지나 나는 내 이야기에 문제가 있음을 걸 알게 되었다. 내 이야기는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적이지만 경박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디자인이 (여전히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듯) 어떤 생산물의 시각적 요소를 꾸미는 일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디자인이 어떤 생산물의 시각적 요소를 꾸미는 일이라는 전제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나는 디자인의 숙명이나 디자이너의 태도에 대해 말하기 전에,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해야 했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어떤 생산물의 시각적 요소를 꾸미는 일이라면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 당연히 자본에 봉사하는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이 어떤 생산물의 내용과 본질을 조직화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 생산물의 존재적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그 생산물에 담긴 자본의 욕망을 정화하는 것일 수 있다. 디자인은 산업적 개념이 아니라 생태적 개념이며, 말하자면 디자인은 나무나 돌이나 풀이나 이끼일 수 있다. 그래서 디자인은 인간을 끝없는 욕망기계로 만드는 자본에 균열을 일으키는 어떤 무기일 수 있다.(끝)

2008/12/16 11:58 2008/12/16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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