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08 13:03
생명평화결사에서 마련한 나로선 적이 부담스러운 방식의 토론회(내가 도법스님을 비롯한 9인의 생명평화운동가들에게 질문을 던지는)에, 가기로 했다. 행사 실무를 맡은 최명진 목사는 ‘애정 어린 비판’을 주문했다. 애정 어린 비판이라... 상투적으로 쓰이는 말이지만(대개 ‘애정 어린 비판’은 ‘애정 어린 비판을 가장한 비판’에 불과하지 않은가) 생명평화운동에 대한 내 심경을 그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말은 없다. 나는 그들의 생각을 존경하며(분배와 사회정의를 넘어 지구의 파국을 향해 가는 상황에서, 나는 운동이 결국 그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폭력이라는 그들의 무기가 자본의 체제를 위협하고 무너트리길 기대한다. 아쉬운 건 그들이 오늘 진보운동에 갖는 얼마간의 오해다.
생명평화운동가들은 대개 진보운동이 ‘증오의 폭력이라는 죽음의 가치체계’에 머물고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나는 우선 분노와 증오는 다르다는 걸 되새기고 싶다. 불의와 억압과 폭력의 현장에서 분노는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다. 물론 분노는 자칫 증오로 변질되기 쉽다. 증오는 적을 미워하다 적을 닮아버린 상태다. 증오는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을 낳는다. 분노가 증오로 변질되지 않게 하는 게 바로 생명평화운동가들이 강조하는 영성이다. 그러나 영성에 대한 강조가 지나쳐 정당한 분노마저 증오로 취급하는 건 매우 애석한 일이다. 예수는 영성이 부족해서 성전 장사치들을 불같이 분노하며 내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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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된 말이나, 생명평화운동가들의 그런 오해는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과거 진보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진보운동이 갖는 한계를 누구보다 깊게 체험했으며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생명평화운동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만큼 성숙하지만 대신 자칫 자신이 체험한 과거 진보운동의 한계를 진보운동의 본질적인 한계로 파악할 위험이 있다.
과거 진보운동에 스탈린주의로 대변되는 ‘사람 잡는’ 문제가 있었다는 건 반공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아는 이야기다. 그러나 진보운동은 80년대라는 그 전성기를 마감하고 동료들이 모두 돌아간 지난 십수년 동안, 특히 ‘개혁’이라는 진보운동을 참칭한 자본화 공세가 진행되는 지난 십여년 동안 뼈를 깎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왔다. 그리고 전혀 다른 의식과 감성으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은 여성이나 소수자, 생태, 평화, 대중문화, 일상 등 과거 진보운동에서 부차적으로 취급되던 문제들을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오늘 진보운동 진영에 ‘분노와 증오의 가치관’에 매몰된 깡통 유물론자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세상이 변하려면 사회구조가 변해야 할까요, 개인이 변해야 할까요?” 강연장에서 청중 한 사람을 지목해서 질문하면 언제나 별 어려움 없이 가장 현명한 답을 듣곤 한다. “둘 다 변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 둘 다 변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늘 한쪽으로 치우치곤 한다. 80년대는 모든 진지한 사람들이 사회구조의 변화에 집중했던 시기였다. 바꿔 말하면 사회구조의 변화에 치우쳐 개인의 변화엔 소홀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영성의 시대라 불리는 오늘 진지한 사람들은 개인의 변화에 집중한다. 바꿔 말하면 오늘은 개인의 변화에 치우쳐 사회구조의 변화가 소홀히 취급되는 시절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라는 제국주의 이후 가장 사악하고 폭력적인 자본의 지배체제가 지구를 장악한 오늘은 오히려 80년대보다 더 사회구조의 변화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다. 그렇지 않을 때 운동은 너무나 지당해서 아무런 사회적 역동성이 없는 ‘착하게 살자’ 차원으로 떨어지게 된다. 생명평화운동과 진보운동은 그 사상과 가치체계에서 일정한 차이를 갖다. 그러나 그 차이는 두 운동이 서로를 배제하는 데 사용되어선 안 된다. 그 차이는 오로지 두 운동이 자신의 한계와 결점을 보완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두 운동이 조화를 이룰 때, 싸움과 기도가 정치적 급진성과 영성이 현실적인 것과 근본적인 것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죽음과 폭력의 자본의 지배 체제가 균열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한겨레21, 일러스트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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